얼마 전 지인 둘을 만났다. 두 명 다 언니와 조카가 있어서 그들의 언니와 조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언니들이 조카를 양육함에 있어 교육적으로 많은 에너지와 돈을 들인다고 했다. 영어도 시키고, 좋은 (비싼) 유치원에 보내고, 예술 쪽으로도 한 가지 정도는 해야 하는 그런 양육 방식을 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들의 언니들은 자녀들이 '남에게 뒤쳐지지 않는' 교육을 받기 원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왜 그것에 민감할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자녀들이 현 시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의 기준은 무엇일까? 우아한 인성과 각자의 고귀한 꿈을 실현하는 것? 그렇다면 그들은 남들과 비교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남들에게 뒤쳐진다는 말은 나와서는 안 된다. 남들하고 비슷한 수준, 또는 조금 더 뛰어난 수준을 이야기하는 것은 숫적이다.
이상적인 인간상
어린이 교육부터 이야기 해보자. 왜 그렇게 부모들은 어린이들에게 많은 교육을 쏟아부을까? 그 교육의 끝은 좋은 대학이다. 이 좋은 대학은 왜 나와야 하는가? 좋은 직장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은 무엇인가? 개인마다 차이는 분명히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좋은 직장이란 평균 이상의 연봉과 고용 안정을 제공하는 직장으로 인식된다. 사람인에서 2018년도 직장인 및 구직자 2,259명을 대상으로 '직장선택의 기준에 대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은 연봉을, 구직자는 고용안정성을 1위로 뽑았다. 그러니 안정적으로 돈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 좋은 직업이다.
왜 안정적으로 돈 많이 버는 직장이 필요한가? 이것은 결혼의 가장 큰 가능 요인이다. 통계청에서 2018년도 미혼남녀 20-44세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의 가장 커다란 이유는 경제적 요인이다. 돈 때문에 결혼 하기도 하고, 결혼을 안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지만 개인차가 있다. 나는 다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통계를 말할 뿐이다.) 왜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려하는가? 결혼을 하면 집도 사고 아이들도 낳고, 다시 또 양질의 교육도 제공하면서 그렇게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가족상을 꾸리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럼 여기서 질문을 하나 던져보자.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집을 사고, 자녀 양육을 하는 것이 충분한가?? 그리고, 만약 그렇지 않으면 가정을 꾸릴 수 없다는 것이 올바른 현상인가?
부채인간과 신용자
2015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서울에 사는 사람들 중 40%만이 자가를 점유하고 있다. 그 중에서 오직 40%만이 주택담보대출을 끼지 않고 자가를 소유하고 있다(사실 내 예상보다 높아서 조금 당황했다). 그렇다면 서울 인구를 100명으로 쳤을 때, 오직 16명만이 주택담보를 끼지 않고 자가를 소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나머지 84명은 모두 다 빚을 지고 있다. (전세나 월세는 보증금을 담보로 돈을 지불하며 주인집에 사는 것이므로)
좋은 직장을 아무리 다녀도 집을 사려면, 빚을 져야만 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은 이걸 아무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집을 사려면 대출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르게 이야기하면 '좋은 직장'은 다른 직장보다 대출이 더 많이 쉽게 이뤄지는 직장이다. 우리가 초중고 내내 우리의 사간과 자유를 빼앗겨가며 공부한 이유는 결국 더 많은 대출을 쉽게 받기 위해서였다. 지인의 언니들이 딸을 교육하는 이유는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는 '신용자'로 만들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느껴질 만한 신용, 은행으로부터 대출금을 빌려줄만하다고 하는 신용을 갖춘 그런 사람말이다. 그런데 그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이 시대에서 빚을 지며 살아가는 소위 '부채인간'으로 사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상환만 잘 한다면 돈 없는 사람들도 집을 살 수 있는 아주 좋은 제도이지 않은가?
이러한 질문에 수많은 철학자들은 부채 경제가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니체를 비롯해 마르크스, 들뢰즈와 가타리. 그리고 이탈리아의 철학자인 마우리치로 라자라토. 그는 그의 책인 『부채인간』을 통해 부채 경제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부채와 사회의 관계
라자라토는 현대 자본주의는 교환의 경제가 아닌 부채의 경제임을 밝힌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현 사회는 부채를 당연한 것처럼 권유하고, 실제로 최상위 소득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부채 없이 살 수 없다. 대출은 신용을 통해 이뤄진다. 여기에서 신용은 미래에 대한 가능성과 약속을 기반으로 형성된다. 이 사람이 돈을 빌려줬을 때 과연 갚을 수 있을 것인지가 신용의 핵심 내용이다. 대출의 상환능력이 바로 신용인 것이다. 그러나 이 신용 자체도 돈을 빌려야만 쌓을수 있다. 신용평가 기관은 부채상환을 얼마나 잘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용을 평가한다.
예전에 사업을 할 때, 은행에 가서 대출 상담을 받았던 때가 기억이 난다. 상담원은 내가 신용 점수가 너무 낮기 때문에 청년사업자이더라도 대출은 어렵다고 말했다. 나는 한 번도 대출을 받아본 적이 없고, 신용카드조차 쓰지 않는데 어떻게 신용이 낮을 수 있냐고 물었다. 상담원은 그렇기 때문에 신용 점수가 낮다고 말했다. 신용 점수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신용카드를 쓰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신용은 부채를 통해 형성된다.
한 마디로 부채 없이는 이 사회를 살 수 없다. 이 부채는 신용에 의해 이뤄지고, 신용은 부채 상환을 통해 이뤄진다. 최상위의 소득자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사람들이 채무자이다. 이것은 다만 개인에게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나라의 정부는 민간 은행을 통해 대출을 받고 그것으로 나라의 정책을 운영한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나라는 다른 나라에게서 대출을 받기도 한다. IMF 때 우리나라나 그리스, 이탈리아처럼 국가 전체가 채무자가 되는 그런 모습도 있다.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
앞서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보자. 돈 빌리고 돈 갚는 것이 왜 문제인가? 라자라토가 이야기하는 부채 경제의 문제는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가 도덕적이자, 권력 관계이기 때문이다. 먼저 도덕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니체는 『도덕의 계보』 2편에서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는 도덕을 형성한다고 밝힌다. 우리는 부채의 관계에서 오직 채무자에게 도덕의 책임을 문다. 채무자가 대출을 상환하느냐 아니냐만이 도덕적 문제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대출 상환 능력은 바로 신용이다. 우리는 신용을 기반으로 사람을 도덕적으로 옳다 그르다 평가한다.
예를 들어,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다니면 우리들은 '저 사람은 열심히 공부했고, 부지런할 것이며, 도덕적으로 옳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이 그런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좋은 대학을 다니고, 학보의 기자로 일하며 봉사활동도 열심히 하는 청년은 아동 포르노물을 제작해서 유포했다(n번방 사건). 수 많은 기업가들은 탈세를 자행한다. 고위 관료들은 법을 지키지 않고 한 나라의 대통령은 심지어 임기를 마치지 못한채 감옥에 체포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유 없이 채권자에게는 도덕적 호의를, 채무자에게는 도덕적 불호를 보인다. 같은 유럽 사람이더라도 우리는 독일인들은 부지런하고, 그리스인들은 게으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남아 사람들은 모두 다 게으르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신용이 의심스러운 자들은 비도덕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두 번째로 채권자와 채무자는 권력관계이다. 채권자는 대출 시에 채무자가 대출을 상환할 것이라는 약속을 한다. 이 약속은 불확실한 것이며 예측이 불가능하다. 이것을 확실하고, 예측이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담보'와 '계약'이다. 채권자는 대출 상환의 조건으로 채무자의 시간과 경제 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가치조차도 담보로 잡는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샤일록은 바사니오의 돈을 빌려주면서 친구인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담보로 잡는다. 현대의 채권자는 대출을 상환하지 못할 시, 신용을 잃어버리게 된다. 신용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본인의 이름으로 통장조차도 못만들고 취업조차 할 수 없다.
또한 채권자는 대출 상환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갖는다. 그들은 대출을 상환하기 위해 자신의 시간과 결정권을 채권자에게 헌납한다. 우리가 매달 카드값 얼마, 대출금 얼마를 빼놓고 자신의 삶을 계획하는 것이 그러한 이유이다. 또한 부채 때문에 안 맞는 직장임에도 근무를 지속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결국 채권자는 부채로 인하여 스스로 주권적인 삶을 살지 못한다. 당신은 왜 일 하는가? 더 많은 대출을 받기 위해서 혹은, 부채를 갚기 위해서 일하고 있진 않은가?
이것은 정치적이기도 하다. 채권자는 채무자를 착취, 복종, 명령, 지시할 수 있다. 내가 빚을 갚지 못할 경우 재산이 경매로 넘어가는 경우라든지, 국가의 정책이 금융 기관에 의해 결정되는 것들이 이러한 일들이다. 이러한 윤리, 정치적 권력관계의 피해는 결국 채무자에게 돌아온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서울 시민의 84%는 채무자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채권자가 금리를 인상하는 경우 채무자의 부담은 가중된다. 이건 당연한 일이니 별 다른 설명 없이 넘어간다. 나라가 빚이 많아지는 경우, 정부는 공적 사업을 민간화 하려 한다. 복지 혜택은 당연히 줄어든다. 채권자 혹은 채권 국가들은 긴축정책을 통해 대출 상환을 요구한다. 그 피해는 복지의 수혜자들이 겪는다. 실업급여는 줄어들고 세금의 비중은 높아진다. 연금의 수혜율은 낮아지지만 연금을 내야 하는 비중은 올라간다. 임금은 줄어들고, 기업들은 상품의 가격을 올린다.
결국 채무자들은 신용을 갖기 위해 살게 되고, 부채 경제에 의해 점점 더 많은 빚을 지는 괴 현상이 가중된다.
내 월급이 통장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는 이유
흔히들 월급이 살짝, 내 통장에 흔적만 남기고 증발한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카드 값과 대출금, 세금 때문이다. 우리는 대출을 해야만 살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개인의 신용을 지키기 위해 신용카드를 사용하고, 대출을 이용한다. 대출 없이는 자가를 소유할 수 없다. 월급의 실 수령액은 입사할 때 이야기한 것과 많이 다르다. 엎친데 겹친 겪으로 우리의 연금비중은 언제 높아질 지 모른다. 현재 우리는 9%의 국민 연금 비중을 내고 있고, 수혜자들은 기본 생활비의 40%를 수령한다. 하지만 이 비중이 계속 유지 될 경우 30년 뒤에는 -163조의 적자가 난다고 한다(2020.06.23 조선일보 기사: https://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3/2020062300283.html). 이 방법을 타계할 방법은 국민 연금 비중을 25%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국민 연금에만 속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당신의 월급은 앞으로도 흔적만 남기고 증발해버릴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 당신은 본인의 시간과 선택을 억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부채의 간격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당신은 더욱더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스스로를 사치스럽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평가할지도 모른다.
해결책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는 앞서 이야기한 부채 경제가 심각해지면서 터졌다. 금융은 수 많은 대출상품을 만들었고, 월급이 많지 않아도 집을 살 수 있다며 소비자들을 현혹시켰다. 이에 집 값은 비이성적으로 상승했다 (마치 요즘 우리나라를 보는 듯하다). 집 값 상승률에 비해 임금의 상승률은 오르지 않았고, 채무자들은 상환을 포기하기에 이르고 개인 파산을 신청한다. 결국 부채를 상환받지 못한 금융회사들도 기업 파산을 신청한다. 문제는 이 회사들도 부채나 주식에 의해 세워진 회사들이란 점이다. 이 때문에 금리는 변동되고, 담보였던 집 값은 폭락한다. 기업들의 가치는 하락하고, 복지 정책 때문에 국가의 빚은 더 늘어간다.
똑같은 상황을 겪지 않기 위해, 유럽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타계책으로 '은행의 구제'를 선택했다. 그들은 은행이 파산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도미노 현상을 예방한다. 하지만 이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결국엔 현상유지일 뿐이다. 그들은 은행을 구제하기 위해 세금을 사용하고, 이것은 복지의 축소와 더불어 국가 부채의 늘어남을 뜻한다. 결국 채권자인 극소수의 사람들은 더욱 더 부자가 되어지고, 채무자들은 점점 가난해진다.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는 아쉽게도 『부채인간』에서는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만 '부채를 상환하지 말아라' 고 말한다. 프랑스 혁명이 그러했던 것처럼 집단적인 용기와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쫄려서 못하겠다는 것이다.
『부채인간』은 현시대의 부채경제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소개한 책이다. 아쉽게도 저자는 현재 논의 되고 있는 해결책들을 소개하고 지적하는데 그친다. 그의 다른 책에서는 이러한 현상에 해결책을 집중적으로 제시한다고 하니 속편을 읽는 기분으로 꼭 한 번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