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평범성'이 드러나기까지, N번방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읽고

by 루틴강

유대인 학살에서 텔레그램 N번방까지


2013년 10월, 유럽 여행 중 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원(홀로코스트 추모관)'에 방문한 적이 있다. 해질녘에 도착한 그곳의 풍경은 엄숙하다 못해 침울한 감정을 일으켰다. 안으로 들어갈 수록 깊어지는 바닥과 점점 높아지는 비석의 대비는, 깊은 곳으로 향할 수록 어둠을 짙게 만들며 당시 유대인들의 암담한 현실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당시에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희생되었다는 단편적인 사실만 알고 있었다. 역사적 배경이 전무한 채로 그들의 죽음 앞에 막연한 슬픔과 애도를 표하며 한참을 말 없이 거닐었다.


역사적 인식이 부족한 탓에 수많은 유대인이 죽어간 것이 나치의 잔혹함과 잔인함 때문으로만 알고 있었다. 유대인들이 겪었던 처절한 상황들과 나치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행한 범죄 행위에 대해 협소한 인식과 이해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러던 중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접했으며, 이를 통해 나치가 가학적인, 잔혹할 정도로 잔인하게만 유대인을 죽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또 범죄 행위자들의 인간성을 무감각해지도록 만들어가며 범죄 행위를 해왔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한나 아렌트의 글을 읽고 있는 중에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이 터졌다. 이전에도 대한민국에 존재했던 성범죄, 성도촬 범죄, 성착취 범죄 등과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정도의 가학적이고 충격적인,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감당이 안 되는 범죄가 드러났다. 이 사건을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던 중 언론을 통해 '박사'가 잡현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리고 그의 말과 행동을 보며 '아이히만'이 겹쳐 보였다. 상투적인 표현을 통한 현실의 무감각은 물론이고, 말하는 데에 무능력함, 생각하는 데에 무능력함,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에 무능력함(p106)이 더욱 조주빈과 아이히만이 겹쳐보이게 하는 데 일조했다.


더욱이 대한민국 커뮤니티 사이트에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언어규칙'-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고 문화를 만드는 것-까지 고려하면, 이 범죄는 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의 행위와 전폭적으로 유사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 뿐만 아니라 범죄의 잔혹함과 치밀함이 후속 보도를 통해 드러남으로써 나치의 범죄행위와 버금가는 수준이라는 충격을 받았다. 이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나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이 범죄자의 처벌과 도덕적 사유와 인간에 대한 가치에 대한 고민, 재발 방지를 위한 다양하고 여러 층위의 대책들을 토론하는 결과를 남긴 것과 동일하게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는 성착취 범죄에 대한 문제와 재발 방지를 위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재판의 귀추를 주목하게 된다.


거의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2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범죄가 반복되고 있는 현실에 대한 개탄, 아이히만과 텔레그램 N번방의 범죄 행위의 동질성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범죄를 인식하고 범죄행위를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해보고자 하는 것에 이 글의 목적을 둔다. 또한 '악의 평범성'이 개인의 범주에서 사회로 확장되어 갔는지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추적해보고자 한다.



악의 평범성이 사회에 드러나기까지


유대인에 대한 반감, 반유대주의의가 당시 유럽사회에 팽배했다는 것은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서 확인 할 수 있다. 한 국가 안에서 유대인이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으로 자국민 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는 인식이 중론인듯 보인다. 하지만 이는 모든 상황에서 동일시 하기는 어려우며, 각 사회 내에서도 유대인들의 지위는 편차가 있었고, 평균적으로 산출해내기도 불가능하다. 당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는 이 책을 제외한 다른 서적을 읽어보지 못해 충분히 다룰 수 없는 점이 있었고, 이 글의 한계점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반유대주의 정서가 통용되어왔다는 사실은 확인 할 수 있었다. 히틀러와 나치는 이러한 사회적 반감을 적극 이용해 유대인을 학살했고, 이에 여러 유럽 국가들이 동참했다. 다만, 모든 국가에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동조와 동감을 일으킨 것은 아니었으며 정치적 이유에 있어 유대인을 보호하려는 움직임(p252, p254)도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당시 시대를 통찰 할 수 있는 전체주의에 대한 개념이 필자에게 없어 시대적 배경과, 반유대주의가 팽배했던 사회에 대한 분석과 고민은 담을 수 없다는 점을 밝힌다.


다만, 범죄 행위자의 주변에서 벌어지던 당시의 만연한 두 가지 범주의 행위들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가 있다. 본문에서 판결문에 나오는 말처럼 아이히만은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양심을 갖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p198)에서 볼 수 있듯이 아이히만이 추앙하고 받아들일 사회 지도자들의 지지가 있었다. 반면, 본문 중(p204) 목사로서 당신(그뤼버 감독)은 그에게 설교하고, 그에게 그의 행위가 도덕성에 모순된다고 말하려고 시도해보았습니까? 라는 질문에 "행동이 말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또 "말해 보았자 쓸데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이는 범죄 행위자들에게 제제를 가하지 않은 것은 결국 무관심과 방관으로 범죄에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는 개인 또는 조직 내에서 발생한 것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범죄행위자가 도덕적 사유, 적어도 이것이 범죄이며 행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게 만든 사유의 무능력은 나치가 의식적으로 활용한 '언어규칙'에 기반을 둔다. 말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시켜주며, 언어규칙을 통해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킨다.(p21) 아렌트는, 기만과 은폐를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다양한 언어규칙이 살인자들의 정신상태에 작용한 어떤 것보다 더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 했다고 한다. 나치는 살인이라는 말 대신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을, 대규모 학살을 '최종 해결책'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감각을 마비시켰으며, 그들만의 비밀적 소통을 통해 조직을 더욱 공고히 했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가 언어규칙을 활용함으로써 의도했던 것은 범죄 행위자와 당시의 모든 이들의 사고를 제한하고 사유를 편협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이히만의 문제는 그가 인간관계에서 차이를 알지 못하거나 차이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는 사람(p40)이라는 점이며,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차이를 지우려 하며 결국 폭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p42)이다. 또한 언어규칙을 통한 사고의 편협은 아이히만에게만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아이히만을 포함한 그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그들은 아주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여전히 정상적(p379)라는 점이다.


아이히만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보내는 데 상당히 유능했지만(아이히만은 나치의 하급 관리였으며 유럽 전역에 유대인들을 이주시키는 역할을 했다. 철도, 선박 등의 교통을 이용하여 대량의 이주를 기획 및 계획했으며 이에 대해서는 전문가로 지칭되었다.),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의 기존 언어규칙 없이 적절한 태도로 설명할 능력이 없었다(p221). 언어규칙을 기반으로 범죄행위자의 사유의 무능력과 말하기의 무능력이 가속·가중화 됨으로써 죄책감에 대해 무감각해질 수 있었다. 이는 아이히만뿐만 아니라 일선에서 활동했던 모든 전범들 모두에게 포함된 요소였다.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정상적인 사람처럼 보였으며,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으며, 아무런 위화감 없이 우리의 주변에서 함께 살아갔던 것이다.


악의 평범성은 타인에 대한 반감, 차별과 범죄에 대한 구성원들의 관망과 방관, 국가와 사회의 묵인, 이를 악용하고자 하는 조직적 체계적 움직임, 그리고 이것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친 사유와 말하기, 타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의 무능력이 종합하며 드러난다.



우리는 무엇을 되새겨야 하는가


위에서 언급한 언어규칙이 비단 전쟁 상황에서만 존재했을까? 아니다. 언어규칙은 우리의 일상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학창시절 가까이 지내는 친구들, 혹은 같은 반 친구들과 했던 대화를 기억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우리만의 언어로 본래의 언어를 감추며, 그것이 우리 외의 사람들 앞에서도 아무런 여과없이 사용되곤 했다. 더 어린 나이에서도 드러나는 이 같은 예시를 보며 인간의 본성인가에 대한 고민도 든다. 그러나 개인의 먼 과거로 돌아갈 것도 없이 동아리나 동호회에서, 직장에서, 무수한 공동체에서, 특히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서 언어규칙이 사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N번방에서도.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은 "저에게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죄한다.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아이히만은 자신의 사형 집행에서 마지막으로 "잠시후면, 여러분, 우리는 모두 다시 만날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운명입니다."(p349)라고 말하며 상투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장례식인 것을 잊었다. 아렌트는 이를 두고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고 말한다. 두려운 교훈,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p349) 아이히만과 조주빈, 유대인 학살과 N번방의 사건이 동일하게 보이는 것이 결코 이상하지 않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치의 범죄행위가 재판을 통해 더 상세히 드러나면서 그들이 저질렀던 만행이 낱낱히 공개 되었다. 이는 단지 유대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p34)라고 아렌트는 지적한다. 또한 악을 범한 자가 법정에 서야 하는 이유는 그의 행위가 공동체 전체를 어지럽혔고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p360)이라고 말한다. 복구되어야 하는 것은 일반적인 공적 질서이며, 다른 말로 하면 우세하게 드러나야 할 것은 법이지 원고가 아니(p361)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N번방을 보고있으면, 우리 사회는 여전히 범죄 행위자 개인에게만 주목하고 있는 듯보인다. 예루살렘의 재판을 통해 나치 전범들의 죄를 밝히는 것 외에도 사회의 공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것, 또 다른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의 헛점을 드러내는 과정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N번방 재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유대인 학살과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은 결코 지워질 수 없다는 점, 사회에 대단히 큰 충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인류에 대한 범죄로 인식되어야 한다. 더욱이 아렌트가 에필로그에 남긴 말을 통해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일단 한번 등장하여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행위는 그러한 발생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류에게 남은 것은 인간적 사건들의 본질 속에 놓여있다. (...) 일단 어떤 특정한 범죄가 처음으로 발생한다면 처벌이 무엇이든 간에 그 범죄의 재출현은 그의 최초의 출현보다도 훨씬 가능성이 높다.(p375)]


우리가 N번방 사건을 면밀하게 분석하고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시 동일한 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유하지 않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범죄가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예루살렘 재판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p392)이라고 후기를 남긴 아렌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우리가 악의 평범성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들은 자기를 이끌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판단뿐이고, 그 판단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판단과 어긋날 때에도,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분 할 수 있어야 한다(p400)는 본문의 내용을 새겨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N번방을 어떠한 계기로 삼을 것인지, 무엇을 바꿔낼 것인가 끊임없이 사유해야 한다.




Thanks to 안태호, 김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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