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맞는 집이란 무엇일까

노은주, 임형남 저서 4권을 읽고

by 루틴강

노동에서 건축으로, 관심의 확장


정체성, 30대를 맞이하고 2020년을 시작한 지도 4개월이 지났다. 지난해 6월부터 일을 그만두고, 활동을 정리하고 이곳으로 왔다. 그리고 이곳에서 지난 20대를 돌이켜보는 시간을 갖고 있다. 경찰대학교, 재수와 삼수, 청년유니온, 노동조합, 기자단, 서울 청년허브, 사람, 관계, 사랑, 연애, 시, 글, 겸손, 짜증 등 크고 작은 나의 정체성들을 생각하곤 한다. 결국, 이어지는 고민 속에서 '나는 누구일까? 나는 어떤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라는 생각을 되뇌곤 한다. 나의 20대 정체성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지에 대한 고민, 가장 중심이 되는 것, 뚜렷한 정체성이라고 하면 '노동'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대 초반부터 청년유니온 활동을 시작했고, 그 안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며 사람을 만나고 결과적으로 수많은 직책을 맡으며 20대를 보냈다. 자연스럽게 노동조합 간부로서 필요한 덕목들을 습관화하게 되었으며, 노동을 통해 사회를 인식하고 바라보는 방법을 습득했다. 그것이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하나의 관점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러한 20대를 보낸 것에 대해 대체로 만족하며, 오히려 노동이란 덕질(?)의 영역이 있음으로써 관점이 깊어졌다고 느낀다. 하지만 반대로 노동 외에 것에는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반대로 관심을 두지 못했던 것도 있었다. 20대를 돌이켜보면 노동의 영역에서는 깊이 있는 고민과 관점을 얻었다고 한다면, 그 외에 것들에 있어서는 너른 관심과 필요한 인식 정도였다.


어느 쉬는 날, 유튜브를 통해 EBS 다큐멘터리 <건축 탐구 - 집>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에 맞춰 집을 설계하고 살아가는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다. 집이란 것이 삶에서 뗄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개 집을 구하는 것은 이상과 가치관의 영역이 아닌 현실의 문제라고만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범한 직장생활을 통해서는 더 이상 자신의 가치관에 맞는 집을 구할 수 없게 된 현실에 매몰된 것만 같이 보인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에 맞는 집을 짓는다는 것은 머나먼 후일에나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다. 현실이 가혹하여 그곳에 삶 자체를 묻어둔다 할지라도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만은 부여잡고 나에게 머물러 있게 하고 싶은 소망을 품으며 주인공들의 삶을 바라보았다.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주인공들의 삶과 가치관을 들여다보며 호기심을 키웠다. 그리고 두 저자가 말하는 건축에 대한 관점과 이해를 더 배우고 싶어 <집을 위한 인문학>, <골목 인문학>, <집, 도시를 만들고 사람을 이어주다>,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네 권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통해 건축으로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알게 된 점, 노동 외에 것들로 삶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게 되었으며, 건축을 통한 사람과 사회, 삶에 대한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책을 덮은 후로부터는 나에게 맞는 집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며 나는 어떤 사람이며 나의 정체성은 무엇이고, 나의 동반자와는 어떠한 공간에서 함께 살고 싶은지 생각하게 한다.




내가 살아온 집과 동네, 그때의 기억


어떤 공간이 절대적으로 좋은 게 아니고, 그 안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있었는지, 어떤 행동을 했고, 어떤 느낌이 있었고, 어떤 생활을 했는지, 그곳에서 만들었던 추억과 분위기, 이런 것들이 집에 대한 생각을 만들어주는 것 같다. <집을 위한 인문학> p36


내가 살았던 집 중 첫 번째 집이라고 기억하는 것은 7살 때의 집이다. 정확히 7살 때만 지냈던 집은 아니다. 7살을 기준으로 전후에 지냈던 개인 주택의 1층 집이었다. 더 정확히 우리 가족이 소유한 집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의정부의 작은 동네였고, 재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내가 살았던 그 시절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2014년 친한 친구와 함께 여름휴가 겸 예전 동네를 탐방(?)하는 나름의 놀이와 휴가를 겸비한 여행을 떠났다. 실제로 멀리 떠나는 여행과 비슷하게 계획도 세워보고, 식당도 찾아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7살 때의 추억 속의 그 집 외에도 다양한 집에서 살았다. 그럼에도 이 집이 가장 첫 번째로 떠오르는 이유는 그 집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엄마와 지냈던 시기였고, 항상 잠을 자기 전에는 불을 끄고 엄마와 그날 있었던 일들을 공유했다. 그때 그 말들이 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때의 그 느낌과 감촉이 오랫동안 기억되곤 한다. 또 할아버지에게 짜증 냈던 순간, 큰 이모와 몇 달 동안 같은 방을 쓰며 대화를 나눴던 시간들도 기억난다. 특히, 큰 이모와는 TV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드라마 주인공에 몰입해서 주인공에게 피해를 준 상대역을 보게 되면 혼내주겠다는 말을 했던 것 같다.


집 내부에서의 프로그램도 다양한데, 대문 안에서의 다채로웠다. 당시에 흰색 진돗개를 키우게 되었는데, 새끼일 때는 밤에 혼자 자는 것을 무서워하던 친구였다. 집에 들어오게 하고 싶었는데 할아버지의 반대로 불가능했다. 어린 마음에 잡지에서 사람 사진을 오려 강아지의 집 입구에 붙여줬다. 강아지의 집은 목수였던 할아버지의 작품이었다. 생각해보면 꽤나 근사한 강아지 집이었다. 그리고 요새도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았던 병아리를 열심히 키웠던 기억이 난다. 14년에 다시 찾은 그 집은 여전히 그대로였는데, 내 기억 속에서는 넓고 충분한 공간이었던 집 주변이 덧없이 작아 보였다. 또한 그때는 넓었지만 지금은 작아진 그 공간에서 나는 엄마한테 많이도 혼났던 것 같다.


집 주변 활동반경을 넓혀보면 더 즐거운 추억이 많다. 살고 있는 집과 뒷집, 양측의 옆집, 집들이 다들 살을 맞대고 즐비했다. 뒷 동네 친구를 만나러 가야 할 때는 정석대로라면 골목길을 한참 걸어가서 다시 뒷동네 골목에 다다른 뒤에야 도착할 수 있었는데, 당시엔 이것이 너무 번거로워서 집과 집 사이에 있는 우리만의 오솔길로 다니곤 했다. 그렇게 골목길을 누비며 친구들을 만나곤 했다. 그리고 문득 기억나는 것은, 어릴 적 아주 큰 홍수가 났었다. 동네 골목길들이 다 물에 차서 구명보트를 탄 구조대가 우리 가족을 데리러 왔었다. 그때는 상황의 심각성을 몰라서 구명보트를 타고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것이 재미있기만 했다. 골목에서의 활동은 그 좁은 길목에서 옆집 친구, 앞집 형누나들과 팽이도 치고 뛰어 놀기도 했던, 집만큼이나 다양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아지트와 같은 공간이었던 엄마의 미용실도 생각난다. 학교에서 집까지, 그리고 미용실까지의 동선이 지금 생각해도 썩 마음에 든다. 학교가 끝나면 뒷구멍으로 나와 집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 중에 엄마한테 말할 것들을 정리하면서 집을 지나친다. 그러면 앞 동네와 뒷동네를 이어주는 더 작은 골목길이 나왔고, 그곳부터는 또 다른 동네의 시작이었다. 할머니들이 키우는 꽃들이 즐비했고 조금 더 걸어가면 짜장면집이 있었고 2층에는 피아노 학원이 있었다. 그리고 더 걸어가면 떡집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얼음을 생산하는 '냉동공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 작은 상가에 엄마의 미용실이 있었다. 나는 그렇게 여러 동네를 지나며 미용실에 도착했고, 그곳에는 엄마가 있었고 TV가 있었다. TV로 만화영화를 보다가 손님이 가면 엄마랑 이야기를 나누는 나만의 일상이 항상 그곳에서 이뤄졌다.


7살의 그때 그 집과 동네, 그리고 미용실은 나에게 엄마와의 대화가 가득했던 시간이다. 그래서 여러 집 중에 이곳이 제일 먼저 생각난 것 아닐까 생각한다. 저자가 말하는 마을에 대한 정의로 첫 번째 집은 마무리한다.




우리가 아는 마을들은 그냥 단순히 집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하고 그 안에서 순환이 이루어지고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복합체다. 마을은 이런 단위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골목 인문학> p319


다음에 떠오른 집은 은평구 불광에 있는 집과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집이다. 은평구에 있던 집은 붉은 벽돌이 벽면을 가득 채운 곳의 옥탑방이다. 은평구 불광동, 그곳은 또 다른 프로그램이 가득한 곳이다.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두 사람이 있다. 그중 한 사람은 엄마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호혜라는 별칭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 사람에게 고백한 새벽의 그날, 우리는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새벽 내내 이야기를 나눴다. 내심 어떤 말을 해야 이 사람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을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어떤 말들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사람을 알아가는 시간이 늘어가면서 이 동네에 있는 곳곳의 음식점, 카페, 선술집, 호프집 등을 알아갔다. 퇴근을 하고 나면 그냥 집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에 동네를 어슬렁거리곤 했다. 퇴근길도 항상 이곳을 지나치는 방향으로 의도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이때를 회상하면서 한 사람에게 가까워지듯 한 동네에도 가까워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함께 살았던 은평의 집을 정리하고 성산동으로 이사했다. 아직도 이사 당일 모든 짐을 뺀 은평 집 사진이 휴대폰에 있다. 그 사진을 볼 때면 그 집에서 있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은평 집이 높은 곳에서 느낄 수 있는 광활함이 있었다면, 성산 집은 평지에서 느낄 수 있는 넓은 시원함이 있는 집이다. 또 성산동 골목골목의 다양한 볼거리들이 동네를 심심하지 않게 해주곤 했다. 홍대의 번화가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는 동시에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어서 조용하지만 다양한 재미들이 있다. 그리고 어르신이 많은 동네여서 잔잔한 안정감을 주곤 한다. 우리는 이 동네에서 산책을 하며 소소한 일상을 즐기며 시간을 보냈다. 둘 다 한창 바쁜 시기였기에 동네와 집이 주는 잔잔하고 소소한 안정감이 우리에게 위안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또 그것이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서로에게 잔잔하고 애정 어린 마음을 피우게 해주는 배경이 아녔을까.


이제까지 연관 지어 생각해본 적은 없었지만, 지금에야 돌이켜 보면 집과 주변의 환경과 한 사람과의 관계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느낀다. 내가 사랑하는 두 사람을 변함없이 사랑하지만, 공간과 시기에 따라 사랑하는 방식이 조금씩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이들을 더 많이, 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적절하고 알맞은 공간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내가 원하는 집, 우리에게 맞는 집, 대화가 있는 집


땅은 사람을 고른다. 맞는 사람을 고르고 자리 잡게 한다. 그렇게 선택된 사람이 그 땅으로 들어가서 진심으로 섬기면 그곳에서 별문제 없이 잘 살게 되고, 사람들이 그곳을 명당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좋은 땅이나 나쁜 땅을 찾지 말고 나에게 맞는 땅을 찾으라고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준다. 그곳이 바로 당신에게는 명당이라고... <집을 위한 인문학> p194
사실 명당이라고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다. (...) 다만 '어떤 사람'에게 맞는 '어떤 땅'이 있을 뿐이다. 즉 자신에게 맞는 땅을 골라서 그 위에 살게 되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고 그 편안함 속에서 자신의 역량이 배가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p94-95


다큐멘터리 보고 책을 읽으면서 집을 짓고 싶다는 생각을 무수히 많이 했다. 어떤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서는 무엇을 할지 고민하면서 설렘과 흥분을 느꼈고, 땅을 사고 집을 디자인하고 집을 세우는 것까지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서는 막막함에 부딪히기도 했다. 건축, 집이라는 공간을 구성하고 세우는 것에는 여전히 보이지는 않지만 시도하기는 어려운 문턱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 비용적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건축이란 것이 한 번 지어놓은 후에는 변화를 주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무수한 생각들만 반복하게 되는 듯싶다. 또 계획할 당시에는 필요하다고 생각한 공간이 짓고난 뒤에는 필요하지 않게 될 수도 있단 생각에 망설이게 된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고민했던 것들을 간략히 정리해보려 한다.


선호하지 않거나 좋아하지 않은 공간 구성은 대표적인 아파트다. 일단, 획일화된 구조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아무리 좋은 소재와 마감으로 구성된 공간이어도 집에 맞춰 사람이 적응해야 하는 것이 내적 갈등을 일으키게 한다. 더군다나 한국 아파트의 거실 구조가 특히 불편한데, 소파와 TV를 나란히 배치하여 거실에서는 사람이 아닌 TV가 주인공이 되는 구조가 개인적으로는 선호하지 않는다. 집이 커지면 거실이 커지고, 거실이 커지면 소파도 커지고 TV도 커지는 삶의 방식이 내심 불편한다. 더군다나 획일화된 구조를 감추기 위해 다른 소재를 사용하고 약간의 변주만 주는 공간이 나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에는 맞지 않다고 느낀다.


반대로 선호하는 공간은 대표적으로 경복궁이다. 저자는 경복궁이 책에 나온 대로 법칙대로 정연하고 엄숙하게 만들어놓은 정궁[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p33)]이라고 표현했지만, 나는 마사토에 스며든 햇살이 주는 따스함과 자줏빛 목조 건물과 어두스름한 기와에서 주는 차분함, 수많은 인파에도 불구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경복궁의 정취를 좋아한다. 산책하기에도 지루하지 않고 쉬면서 생각하기도 편안한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 그곳에는 있다. 경복궁에는 사람이 주가 되고 자연과 건물은 과하지 않게 사람을 거들어준다는 느낌이 강하다. 분위기가 주는 안정감과 더불어 자연과도 공존할 수 있게 구성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람과 건축, 그리고 자연이 조화롭게 지낼 수 있는 곳이 나에게 맞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집과 나의 선호에 따른 집을 종합해보면, 대화가 있고, 여유와 여백이 있으며, 사람과 건축과 자연이 조화로운 집이 나에게 맞는 집이란 생각이 든다. 혹독한 삶과 현실 속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살다 보면 집에 들어와서는 말 한마디 없이 지내기가 일쑤다. 그것은 삶의 가혹함에도 분명 책임이 있겠지만 우리의 사회가 집을 개인의 삶을 완성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자산과 재산의 일부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개인에게 있어서도 집이란 것이 사회적 자아와 개인적 자아가 공존하고, 두 자아가 서로 도울 수 있는 공간이기를 바란다. 여느 영역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집과 건축에 있어서도 '더 좋은 것'을 추구하기보다 나에게 맞는 것이 더욱 삶을 이롭게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더욱이 삶이란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한다면, 나의 그때 그 집은 당시의 나를 잘 표현해주는 하나의 나의 정체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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