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선생님과 상상 속 미완의 대화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구매한지는 꽤 오랜 시간이 되었다. 그러나 읽기를 뒤로 미뤄둔 채 한 동안 책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곳에 온 후로 신영복 선생님에 대한 관심과 저서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졌다. 동양 고전을 해설해주신 <강의>란 책을 먼저 읽고, 집에 묵혀둔 이 책을 가지고 와서 읽었다. 삶에 대한 깊고 풍부한 고찰에 대해 배우며 틈날 때마다 조금씩 몇 주 동안 읽었다. 감옥에서 지낸 약 30년이란 시간, 내가 경험하는 시간보다 몇 십배는 더 긴 시간 동안 그곳에서 다양한 주제에 대한 성찰을 하신 것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메모에는 "깊은 생각과 짧은 생각"이란 제목을 붙였다.
일전에도 밝혔듯이 나의 짧은 생각들은 신영복 선생님의 깊은 생각을 통해 해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후감을 쓰기가 쉬이 이뤄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무언가 적고 싶은 생각은 지속적으로 있었는데, 적당한 글쓰기 방식이 떠오르지 않아 한참을 미뤄두곤 했다. 그러다 문득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들에 대해 나의 생각을 곁들여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아 대화 방식의 글을 써보기로 했다. 하지만 이렇게 쓰려고 하니 뒤이어 또 다른 고민거리가 생겼음을 밝힌다. 나의 생각이란 것이 글을 쓰는 시점이 자주 변경됨에 따라 그 당시에 중점적으로 생각하고 보고 느끼는 것들 중심으로 뒤섞이곤 했다. 아마도 이 글이 발행된다면, 그 당시 나의 생각들의 집합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은, 신영복 선생님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쓴 글을 대화 방식으로 구성함으로써 문어체를 구어체로 변경했으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도록 문맥과 의미를 헤치지 않는 선에서 수정했음을 밝힌다. 또한 신영복 선생님의 글과 생각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사고해보아야 할 것들이란 생각에 아직 완성하지 못한 대화라는 의미로 '미완'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두었다.
신영복 : 취침나팔이 밤하늘을 울리면 습관처럼 고향을, 부모를, 바깥을 상상하곤 해요. 꿈에나마 그리운 곳, 그리운 사람을 만나보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고요. (P54)
오그낙 : 저도 비슷한 심정을 느낄 때가 많아요. 아침을 알리는 시간이 되면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지, 저녁에는 자기 전에는 담배를 피우면서 오늘은 어떤 하루였는지 생각하게 돼요. 그리고 이따금씩 아무도 없는 시간에 흡연장부터 건물로 들어오는 그 짧은 길을 걸으면서는 못 본 지 한참 된 가족과 사랑하는 연인을 생각하게 돼요.
이제는 벚꽃이 다 져서 파릇한 초록 잎들이 올라왔지만, 얼마 전까지는 가로등에 비친 벚꽃을 보면서 어머니랑 벚꽃을 보러 갔던 산책길이 생각났어요. 또 연인과 벚꽃을 배경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다시 찾아보게 되더라고요. 만나지 못하는 현실에 아득한 생각들이 많이 들더라고요. 이런 날은 휴대폰에 묵혀두었던 사진들을 하나씩 찾아보게 돼요.
그리고 이곳은 취침나팔은 아니지만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는 시간이 분명한 것은 동일한 것 같아요. 그렇게 하루하루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생활이 반복되곤 하죠.
신영복 : 시간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해보죠. '1년은 짧고 하루는 긴 생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나날도 돌이켜보면 몇 년 전이 바로 엊그제 같이 허전할 뿐, 무엇 하나 담긴 것이 없는 생활, 손아귀에 쥐면 한 줌도 안 되는 솜사탕 부푼 구름같이, 생각하면 약소하기 짝이 없는 생활이에요. 그러나 비록 한 줌이 안된다 해도 그 속에 귀한 경험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끝내 '약소'할 수만은 없는 생활이기도 하고요. 그 속엔 우선 '타인에 대한 이해'가 담겨있죠. 저희들은 이 실패자들의 군서지에서 수많은 타인을 만나고, 그들의 수많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가능성 속에 몸담고 있음을 깨닫게 되죠. (p114-115)
오그낙 : 1년은 짧고 하루는 긴 생활이란 말씀, 정말 많이 공감하고 적절한 말씀이다 생각했어요. 분명 어제는 월요일이었는데, 내일은 목요일 즈음이 되는 기분을 매 순간 느끼게 되는 것 같아요. 저 보다는 선생님께서 더 오랜 시간을 한 곳에서 보내셨을 테니 더 많이 느끼셨으리라 생각해요. 저는 1년은 짧다는 말에는 단순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반복됨에 따라 시간이란 것, 세월이란 것에 무감각해져 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어요. 그리고 긴 하루는 주체적으로 나의 하루를 조직하고 계획할 수 없음에서 오는 무기력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결국 1년과 하루가 만나면 짧고도 긴 시간이 되는 거겠죠. 단조로운 일상과 비주체적 삶의 방식을 통해 길고 짧음을 느끼게 되는 것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타인에 대한 이해는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깊이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아요. 일전에도 일을 하며 수많은 관계들을 맺었지만, 이곳에서는 항상 사람과 관계가 가까이에 있다 보니 이해가 필요한 순간도 자주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럼에도 최근에는 크고 작은 갈등을 마주하면서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겠구나. 그리고 저 사람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관계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어떤 사람을 알아가기 까지, 그 사람의 역사와 서사를 알아가기까지는 충분한 시간과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싶어요. 그것을 인위적으로 줄여보려고 과도한 노력을 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행동이겠구나 싶어요.
신영복 : 당신이 있는 그곳과 제가 있었던 곳에서는 관계가 밀집되어 있죠. 사람들은 누구나 거미줄같이 수많은 관계 속에 서지 않을 수 없고 보면 '관계는 존재'라는 명제의 적실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어요. '혼자'라는 느낌은 관념적으로만 가능한 정신의 일시적 함정에 불과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p162)
오그낙 : 선생님의 <강의>라는 책을 보면서 관계에 대한 생각을 좀 더 키웠어요. 동양 고전에서 말하는 관계를 이해하기 전까지 저는 '사람이라는 존재는 혼자서 살아가기에는 불가능한 것이 많기 때문에 서로에게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가며 사는 것이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조금 더 살아보고 책을 통해 배우고 보니 단순히 필요에 의해서만 관계가 해석되지는 않더라고요. 관계를 통해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키우기도 하고 자리잡기도 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혼자라는 느낌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더라고요. 저는 일을 했을 때나 이곳에 있을 때나 일정 정도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나면 소위 말하는 관계의 '단절'이 필요한 성격이에요. 이것이 성격인지 경향인지는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지만 저는 스스로 나는 단절이 필요한 사람이구나 생각하곤 했어요. 그래서 단절이 필요해지는 감정상태가 되면 주머니에 든 송곳처럼 삐죽삐죽 모난 부분이 튀어나오곤 했죠.
그러나 이곳에서는 나의 공간이라고 할 곳이 거의 없거나 아주 좁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또 있었죠. 그런데 혼자라는 느낌은 관념으로만 가능하다는 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는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었어요. 단절이라고 표현한 것이 어쩌면 관계의 멈춤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다른 무언가로 표현될 수 있는 나의 감정은 아니었을까 싶은, 새로운 고민을 해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심리적 단절은 무엇일까 고민해보게 되었죠.
신영복 : 관계는 대화로써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대화는 인관관계의 정체를 가져오며 인간관계의 정체는 관계 그 자체의 퇴화를 가져오며 필경은 양 당사자에게 오히려 부담과 질곡만을 안겨주게 되는 것이에요. (p69)
오그낙 :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대화, 이 문구를 생각해볼 때면 상대방과 해왔던 으레 했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내가 자주 사용하던 단어와 대화에 있어서 나의 태도를 다시 생각해보게 돼요. 이곳에서의 대화는 대부분 단편적이거나 단조로울 때가 많아요. 처음에는 상대방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한 탓으로 생각하곤 했는데, 오히려 그것보다는 함께 해온 시간과 공유하고 있는 가치 또는 생각이 무르익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물론 부족한 대화도 좋은 대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요. 그리고 대화에 있어서는 항상 상대적인 태도가 발휘되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선생님과의 대화처럼 나 보다 어른일 때는 나의 부족함을 깨치는 데에만 해도 온 신경이 몰두해 있는데, 나 보다 어리거나 서툰 사람일 경우에는 조금 더 세심하게 대화하려는 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게 되더라고요. 요즈음은 후자일 경우가 많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최근에 기억에 남는 대화가 있었어요. 무언가 부탁을 하러 찾아간 자리였지만, 그 얘기 보다도 서로 알아갈 수 있는 대화를 나눴죠. 나를 드러내고, 상대방도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는 과정이 상당히 재미있었고 그래서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무어라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서로의 생각이 완결한 문장으로 주고받는 것, 무작정 동의하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갖고 말하는 상대와 대화한 것이 아주 오랜만이었어요. 그리고 이런 대화를 다 같이 할 수 있는 자리가 회의와 토의, 토론이라 생각하는데, 이곳에서도 아주 가끔씩 그런 시간이 있어서 남몰래 그 시간들을 즐기곤 해요. 기계적이고 습관화된 대화를 생각하면서 이 두 가지를 떠올린 이유는, 이것이 인간관계의 정체를 가져오기 전에 한 명의 개인의 사고와 사유에도 정체를 가져오는 것 같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일관된 대화를 지속하게 되면 개인의 정체는 물론 관계의 정체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개인에게 있어 정체됨과 관계에 있어 정체에 대해서는 오히려 지금 보다 일하고 있을 때 더 빈번했던 것 같아요. 정말 습관화된 대화 방식과 매번 비슷한 주제, 그리고 상대방이 있었죠. 그리고 그때는 빈번한 갈등에 피로가 쌓여서 인지하지 못한 채 으레 해왔던 대화를 지속하는 한편, 갈등이 생길 때에는 갈등의 맥락, 그것 자체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상대방을 이해하고 설득하려는 데에 더 초점을 두었던 것은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때의 경험을 반추해보면서 당사자들에게 부담과 질곡을 주었던 것은 아니었나 반성하게 돼요.
신영복 : 그럴 수 있죠.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같은 단어를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그런대로 작은 차이이고, 여러 단어의 조합에 의한 판단 형식의 차이는 그것의 내용을 이루는 생각의 차이를 확대한다는 점에서 매우 큰 것이지요. (p236)
오그낙 : 동의해요. 차이에 대한 것은 이곳에서 보다는 일을 했을 때 더 크고 많이 느꼈어요. 이곳에서는 대부분 대화의 흐름은 제가 경험한 것을 설명해주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일을 했을 때는 안건을 두고 토론하며 무언가 결정해야 하는 흐름이 대부분이었죠. 그때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는데도 불구하고 저마다 받아들이는 개념과 의미가 달라지니 그것을 맞추곤 했죠. 그리고 그것들이 쌓이고 쌓이게 되면 생각의 차이가 되었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 대화와 시간이 치열했기도 했거니와 대화 자체를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요.
더욱이 같은 조직 내에서 결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도 같은 단어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데, 이해관계가 얽힌 다른 조직과 다른 주체와 대화할 경우에는 그 복잡성이 더욱 크게 느껴지곤 했어요. 특히, 이 경우에는 상대와 이해관계가 확연이 다를 때 판단 형식의 차이가 컸다고 생각해요. 또한 개인을 중심으로 두고 생각해보면, 관계 맺고 있는 상대방과 공감대가 낮을수록, 거리가 멀어질수록 차이가 커진다는 걸 이곳에서 느껴요. 이것은 이곳에서 맺은 관계뿐만 아니라 기존에 갖고 있던 관계에 있어서도 동일한 것 같고요.
이곳에 오면서 물리적인 거리가 발생했고, 이것은 재미있게도 두 가지 유형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한 가지는 거리가 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같이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거리가 멀어짐과 비례하여 차이도 커지는 경우였어요. 저는 아직 이 차이가 왜 발생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지근거리에 있을 때는 차이가 있음에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멀어짐에 따라 생각의 차이가 확연히 달라지는 경우가 종종 느껴져요. 제 태도에 있어서도 차이를 줄이려고 하는 노력을 조금씩 덜 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신영복 :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어려울 수 있죠.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도록 은밀히 도와주고 끈기 있게 기다려주는 유연함과 후덕함을 갖추는 일이에요. 이런 경우는 주장과 주장의 대립이 논쟁의 형식으로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잘 아는 친구가 서로 만나서 친구 따라 함께 강남 가듯, 춘풍대아한 감화의 형태로 나타나죠. (p217)
오그낙 : 말씀하신 것을 실천해보려고 정말 부단히 노력해보는데, 매번 어렵게 느껴지긴 해요. 말씀은 막연하게나마 알 것 같은데 논쟁을 논쟁이 아닌 다른 무언가의 길로 향하게 하는 것이 아직은 서투른 것 같아요. 덕이 부족한가 싶기도 해요. 아주 가끔씩 선생님이 말씀한 태도가 발휘되는(?) 것을 느껴요. 그런데 이 마저도 제가 목적을 갖거나 의식하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닐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확실히 갈등이 잠잠해지며 대화가 마무리되었다고 느껴지긴 해요.
그런데 곧바로 드는 고민은 저의 태도에 대한 생각이에요. 상대방의 오류를 스스로 깨닫게 도와주고 기다려주는 것이 저 보다 어리거나 서툰 사람들에게는 발휘되는 것 같은데, 저와 같은 수준 또는 저 보다 어른일 경우에는 참을성이나 인내심이 부족한 것 같아요. 또 연관해서 드는 생각은, 내가 상대방을 나 보다 어리게 보고 있는 것에 대한 괴로움과 상대방의 수준을 내가 무슨 기준으로 나눌 수 있으며, 나는 왜 상대방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라는 내적 갈등과 번뇌가 잇달아 생기더라고요.
조금은 다른 결의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선생님이 말씀한 태도를 저에게 해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은 것 같아요. 가깝게는 제 연인이 말씀하신 태도로 저를 대해주곤 해요. 그럴 때면 참 다정하고 세심한 마음이 느껴져서 저도 스스로 더 생각해보고 대화를 이어나가게 되는 것 같아요. 돌이켜보니 정말 감화되는 것 같네요. 어쩌면 경험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경험은 말씀하신 것을 인지한 상태로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쌓일 수 있다고 느껴지네요.
신영복 : 번외로 갈등에 대해서도 짧게 이야기해볼까요? 싸움은 큰 싸움이 되기 전에 잘게 나누어서 미리미리 작은 싸움을 싸우는 것이 파국을 면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싸움은 잘만 관리하면 대화라는 틀 속에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소화해낼 수 있습니다. 싸움은 첫째 싸우지 않는 것이 상지상책입니다. 그다음이 잘 지는 것, 그다음이 작은 싸움, 그리고 이기든 지든 큰 싸움은 하책에 속합니다. (p392-393)
오그낙 : 처음에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눈에 띄는 갈등, 싸움만을 생각했었어요. 어쩌면 폭력을 수반한 싸움을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 그런데 갈등이라고 표현을 바꿔보니 떠오르는 장면이 조금 더 확장되는 것 같아요. 참 재미있는 것은, 싸우지 않는 상대가 있는 한편 지게 되는 상대도 있고, 작은 싸움을 반복하는 관계도 있고, 승패에 관계없이 싸우게 되는 관계가 나뉘는 것 같다는 생각이에요. 이것은 제가 상대를 대하는 태도와 관계에 임하는 방식이 다 다르기 때문인가 싶어요. 그렇다고 하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지도 더 생각해봐야 할 테고요.
갈등과 싸움은 어느 공간의 특성을 막론하고 항상 존재하는 것 같아요. 선생님이 계셨던 곳과 제가 있는 이곳에서는 밀집된 관계와 그 관계와 보내는 시간이 긴 만큼 갈등과 싸움에 더 신중한 태도를 보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직장과 일터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요. 저는 어느 곳이든 첫 번째라고 말씀하신, 상지상책을 염두에 두고 있긴 하지만 항상 같은 결과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작은 싸움도 큰 싸움도 있던 것 같아요. 갈등을 대하는 태도에도 관계에 따라 다양성이 존재하는 것이겠죠. 그리고 결과가 일정한 경로로 수렴하는 것이 삶과 관계가 성숙해가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신영복 선생님과의 못다 한 대화는 후속편인 <삶과 태도>를 다룬 글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