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 아렌트 저
p21
말은 우리를 현실과 연결시켜준다. 나치스가 언어규칙을 만든 이유는 암호화된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p34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이름 붙였듯이 단지 유대인에 대한 범죄가 아니라 '인류에 대한 범죄'
p40
아이히만의 문제는 그가 본질적으로 혼돈에 빠진 '동일주의자'-인간관계에서 차이를 알지 못하거나 차이에 대해 생각할 능력이 없는사람-이라는 점이다.
p42
'끔찍하게도 또 전율스럽게도 정상적인' 아이히만에 의해 자행된 '인류에 대한 범죄'는 폭력의 행위(즉 홀로코스트)를 포함한다. 폭력은 차이를 지우려 할 때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값비싼 대가이다.
p86
독일의 공식 패배일인 1945년 5월 8일이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가 그 후로는 무엇인가의 회원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 주된 이유였다. "나는 지도자 없는 어려운 개인 생활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 누구에게서도 지령을 받지 않고 명령이나 지휘도 더 이상 나에게 내려지지 않으며, 참조할 수 있는 어떠한 포고령도 없게 될 것을 예감했다. 간단히 말해 이전에는 알지 못한 삶이 내 앞에 놓인 것이다."
p106
그의 말을 오랫동안 들으면 들을수록,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p177
기만과 은폐를 위해 교묘하게 고안된 다양한 '언어규칙' 가운데 이처럼 히틀러가 첫 번째 전쟁을 벌이는 데 살인자들의 정신상태에 작용한 것보다도 더 결정적인 효과를 발휘한 것은 없었다. 여기서 '살인'이라는 말 대신 '안락사 제공'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p198
판결문에 나오는 말처럼 "양심의 소리에 자신의 귀를 가까이 할" 필요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것은 그가 양심을 가지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의 양심이 "자기가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함께", 자기 주변에 있는 사회의 존경할 만한 목소리와 더불어 말했기 때문이다.
p199
제3제국에서 살면서 나치스처럼 행동하지 않으면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전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것뿐이다. '공적 생활에 유의미한 참여를 하지 않는 것'이 어떤 사람의 개이적인 죄를 측정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준이었다고 오토 키르히하이머가 최근에 그의 <정치적 정의>에서 언급했다.
p204
"당신은 그에게 영향력을 주려고 애써보았습니까? 목사로서 당신(그뤼버 감독)은 그의 감정에 호소하고, 그에게 설교하고, 그에게 그의 행위가 도덕성에 모순된다고 말하려고 시도해 보았습니까? (...) 그리고 그의 지금 대답은 아주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는 "행동이 말보다 더 효과적입니다", 또 "말해 보았자 쓸데없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p210
그러고는 계속해서 자신이 최종 해결책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순간부터 칸트의 원리들을 더 이상 따르지 않았으며, 그리고 자기도 그 점을 알고 있었고, 또 그는 자기가 더 이상 '자기 행위의 주인이 아니'라는 생각과 '어떤 것도 변경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다고 설명했다.
p221
그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보내는 데 상당히 유능했지만, 그는 그 문제에 대해 자신의 기존의 '언어규칙' 없이 적절한 태도로 설명할 능력이 없었다.
p334
예루살렘 법정이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을 하게 된 것은 다름 아니라 아이히만이 사실상 무국적 상태였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이 비록 법률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대 오직 무국적 상태로서만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몰살당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국적을 상실해야만 한 것이다.
p342 [판결문]
하지만 "우리가 현재 고민하고 있는 범죄의 경우처럼 엄청나고 복잡한 경우, 즉 수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차원에서 그리고 다양한 행동방식으로 참여한 경우 범죄를 저지르도록 자문하고 유횩했다는 일상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러한 범죄들이 희생자의 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범죄에 개입한 사람들의 숫자의 측면에서도 집단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수많은 범죄자들 가운데 희생자들을 실제로 죽인 것에서 얼마나 가까이 또는 멀리 있었던가 하는 것은, 그의 책임의 기준과 관련된 한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와 반대로, 일반적으로 살상도구를 자신의 손으로 사용한 사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책임의 정도는 증가한다."
p343
그는 다른 수많은 낮은 계급의 전범들만큼 그렇게 지나치지도 않았다. 그들은 '책임'에 대해서 염려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며, 이제는 책임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점을 설명해 달라고 소환할 수도 없다고 강력하게 불만을 제기했다.
p349
죽음을 앞두고 그는 장례 연설에서 사용되는 상투어를 생각해냈다. 교수대에서 그의 기억은 그에게 마지막 속임수를 부렸던 것이다. 그의 '정신은 의기양양하게 되었고', 그는 이것이 자신의 장례식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이는 마치 이 마지막 순간에 그가 인간의 사악함 속에서 이루어진 이 오랜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교훈을 요약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운 교훈, 즉 말과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을.
p360-361
악을 범한 자가 법정에 서야 하는 이유는 그의 행위가 공동체 전체를 어지럽혔고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이지, 민사재판의 경우에서처럼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는 개인에게 해를 끼쳤기 때문은 아니다. (...) 복구되어야 하는 것은 일반적인 공적 질서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세하게 드러나야 할 것은 법이지 원고가 아니다.
p375
일단 한번 등장하여 인류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행위는 그러한 발생이 과거의 일이 되어버린 지 한참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하나의 가능성으로 인류에게 남은 것은 인간적 사건들의 본질 속에 놓여있다. (...) 일단 어떤 특정한 범죄가 처음으로 발생한다면 처벌이 무엇이든 간에 그 범죄의 재출현은 그의 최초의 출현보다도 훨씬 가능성이 높다.
p379
아이히만의 경우 성가신 점은 바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다는 점,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이 도착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다는 점, 즉 그들은 아주 그리고 무서울 만큼 정상적이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정상적이라는 점이다.
p392
이처럼 현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도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p400
피고들이 '법적' 범죄를 저지른 이러한 재판들에서 우리가 요구한 것은, 인간들은 자기를 이끌어 주어야만 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판단뿐이고, 게다가 그 판단이 자기들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만장일치의 의견으로 간주해야만 하는 것과 완전히 어긋나는 것일 때조차도, 사람들은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