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이 나란히 사는 거리에서
[호]
*이번 브런치는 수필 형태로 쓰기 때문에 높임말을 쓰지 않습니다.^^
나는 페낭에서 시간을 걷고 있었다.
낯선 도시를 여행할 때 우리는 흔히 풍경을 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순간에는 풍경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아온 시간의 층위를 마주하게 된다.
페낭이 내게 그랬다.
이곳은 단순히 아름다운 항구 도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믿음들이 오랜 세월 부딪히지 않고 나란히 살아온
시간의 박물관 같았다.
페낭의 조지타운 거리를 걷다 보면 이상한 감각에 사로잡힌다.
한 블록 사이에 모스크가 있고, 그 옆에는 중국식 불교사원과 도교사원이 있으며,
조금 더 걸으면 고딕 양식의 교회와 성당이 나타났다가
다시 골목을 돌면 형형색색의 힌두 사원이 등장한다.
여행자로서 처음엔 그것이 이국적인 장면처럼 보였다.
그러나 며칠을 걷다 보니 깨닫게 된다.
이곳 사람들에게 이것은 특별한 풍경이 아니라,
그저 익숙한 일상이라는 사실을.
엊그제는 설날이었다.
아침부터 거리의 공기가 달라졌다.
붉은 등이 바람에 흔들리고, 상점 앞에는 귤과 붉은 종이가 놓였다.
조지타운, 중국의 도교와 불교 사원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향 연기가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긴 향을 두 손으로 공손히 들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무색하게, 아주 조용하고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누군가는 가족의 건강을 빌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지나간 한 해의 고단함을 내려놓았을 것이며,
또 누군가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경건하게 기도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잠시 그 장면을 멀리서 바라봤다.
향 냄새는 생각보다 부드러웠고, 종소리는 크지 않았으며,
사람들의 움직임은 놀라울 만큼 차분했다.
절을 하는 동작 하나에도 서두름이 없었다.
마치 시간 자체가 느려진 듯했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믿음이란, 어쩌면 속도를 늦추는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다.
메시지는 즉시 도착해야 하고,
카톡은 빠르게 확인되어야 하고,
기다림은 비효율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그저 향을 피우고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멈춰 서 있었다.
그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새해 첫날 중 가장 중요한 순간일 것이다.
나는 가톨릭 신앙인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불교사원 앞에서 이상하게 마음이 움직였다.
내가 이곳에서 이들처럼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종교 의식 이전에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를 위해 빌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기대어 잠시 숨을 고르는 행위.
그것은 어느 문화권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의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나도 불교사원에서 향불을 들고 (성호를 긋지 않고) 기도하며 모래에 향을 꽂았다.
페낭이 특별하게 느껴진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서로 다른 신들이 같은 하늘 아래 존재한다.
누군가는 알라에게 기도하고,
누군가는 부처 앞에 향을 올리며,
다른 누군가는 십자가 아래에서 조용히 눈을 감고,
또 어떤 이는 힌두신들에게 꽃을 바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풍경이 충돌하지 않는다.
소리가 섞이고, 향기가 섞이고, 사람들이 섞이지만
갈등의 긴장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아마도 항구 도시였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왔다.
중국 상인, 인도 노동자, 아랍 상인, 유럽인들.
서로 다른 언어와 음식, 그리고 다른 신을 가진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아야 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충돌하거나, 공존하거나.
페낭은 후자를 택했다.
아니,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이곳의 종교 시설들은 경쟁하듯 높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듯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치 오래된 이웃처럼.
설날 아르메니아 골목과 하모니 스트리트를 걸어가는데,
절과 성당, 힌두와 이슬람 사원에서 가족끼리 기도하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신성한 의식과 평범한 일상이 아무 경계 없이 이어지는 장면이었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 마음에 오래 남았다.
여행을 하다 보면 거대한 절경보다 이런 순간들이 더 깊이 기억에 남는다.
유명한 랜드마크의 이름은 잊어버려도,
어떤 오후의 공기와 사람들의 표정은 오래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날 저녁 숙소로 돌아와 창밖을 한참 바라봤다.
멀리서 시차를 두고 폭죽 소리가 들렸고,
어딘가에서는 잔잔한 아잔 기도소리가 섞여온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같은 도시의 밤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여행은 새로운 장소를 보는 일이 아니라,
익숙하다고 믿었던 세계가
사실은 훨씬 넓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종종 다름을 낯설어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에서 바라보면 그 안에는 놀랄 만큼 비슷한 마음들이 흐르고 있다.
누구나 평안을 원하고,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을 바라며,
누구나 내일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기도한다.
신의 이름만 다를 뿐이다.
페낭에서 나는 종교를 이해했다기보다,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된 것 같다.
향 연기 사이로 보였던 수많은 얼굴들,
조용히 고개를 숙이던 뒷모습들,
그리고 눈이 마주치면 따뜻한 미소를 나누던 장면들.
그 모든 장면이 하나의 문장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다.
아마 시간이 지나도 나는 페낭을 이렇게 기억할 것이다.
여러 신이 함께 살아가는 도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도시로.
그리고 여행이 끝난 뒤에도,
가끔은 눈을 감고 그날 사원의 향 냄새를 떠올릴 것 같다.
바쁘게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춰 서라는,
아주 오래된 방식의 인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