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한달살기(9)/폭죽 속의 설

붉은 도시, 한 달 내내 이어지는 춘절

by 호히부부

[히]



타국에서 맞는 설

막상 설 명절이 끼어 있는 2월 초에 페낭으로 한달살기를 오고 보니,
타국에서 우리의 명절을 떠올리는 마음이 생각보다 깊습니다.

페낭은 중국계(화교) 비율이 높은 도시라
설, 곧 춘절(Chinese New Year)을 크게 쇱니다.


2월이 되자마자 거리는 붉은 등과 장식으로 물들고,
사자춤과 폭죽, 사원 행사가 도시 곳곳에서 이어집니다.

도착한 이후 줄곧 명절 한가운데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명절은 시장에서 먼저 시작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체감되는 곳은 시장과 마트입니다.
세상 어디서나 명절은 장터에서 먼저 시작되는 것처럼요.

사방이 온통 붉은색.
말 그대로 빨강이 폭발하듯 쏟아집니다.


빨강은 액운을 막고 복을 부르는 색,
금색은 부와 번영을 뜻한다고 합니다.
두 색이 함께 쓰이면 ‘대길(大吉)’의 의미를 담는다지요.


춘절 햄퍼(선물세트) 코너도 한가득입니다.
과자, 차, 음료, 전통 과일을 묶어 선물용으로 구성해두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명절 분위기가 물씬 납니다.

특히 귤 세트는 빠지지 않습니다.
귤(만다린 오렌지)은 행운과 부를 상징하는 과일이라
춘절 선물로 빠질 수 없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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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폭죽

다 좋은데, 문제는 폭죽입니다.

정말 시도 때도 없이 터집니다.
가까이서 터질 때면 전쟁이라도 난 듯
소리가 너무 커서 귀마개가 소용이 없을 정도입니다.


춘절 폭죽은 원래 악귀 ‘니엔(年兽)’을 쫓기 위한 풍습에서 시작됐다고 합니다.
‘큰 소리’로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복을 부른다는 의미라지요.

그래서 설날, 첫 방문, 가게 오픈, 사자춤 시작 전마다
의식처럼 폭죽이 울립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펑펑” 소리가 이어집니다.


16일 밤에서 명절 당일인 17일은 절정이었습니다.
잠은 포기하고, 차라리 고층 숙소에서
사방에서 터지는 폭죽을 구경하기로 했습니다.

눈은 화려했지만, 귀는 혹사당한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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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맞이 도심 속 폭죽 세레머니



다민족 명절이라는 것

말레이시아는 평소에는 폭죽 규제가 있지만
명절 기간에는 비교적 규제가 완화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남들보다 더 크게 터뜨리면 복을 많이 받는다는 인식까지 있어
묘한 경쟁심리도 작용한다고 하네요.
그래서 명절이 되면 도시 전체가 폭죽 소리로 들썩입니다.


이 나라는 다민족 국가입니다.
중국계의 춘절,
말레이계의 하리라야(Hari Raya Aidilfitri),
인도계의 디파발리(Deepavali)가
계절처럼 이어집니다.

모두 국가 공휴일이며,
계파를 떠나 함께 축제 분위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명절이 한 공동체를 넘어 ‘나라의 행사’가 되는 풍경입니다.




Setia SPICE Arena의 대형 행사

춘절 당일에는 시가 주최하는 대형 공식 행사장을 찾았습니다.
다민족 통합형 명절 행사로,
여행자도 무료로 참여할 수 있다고 하여 궁금했습니다.


페낭에서 가장 큰 실내 행사장인 Setia SPICE Arena.
오후 2시부터 약 두 시간 반 동안 이어진 행사는
규모도, 참여 인원도, 음식도 모두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입구부터 사자춤이 흥을 돋우고,
안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연회장이 펼쳐집니다.

무대 앞에는 초청 인사들을 위한 연회석이 마련되어 있고,
일반 시민들은 여러 음식 부스를 돌며 식판에 음식을 받아가는 방식입니다.


말레이, 중국, 인도계 음식이 뒤섞인 그야말로 다문화 뷔페.

긴 줄에 잠시 주저했지만,
행사 후반이 되자 대기 줄이 줄어 우리도 도전했습니다.
생각보다 푸짐하고, 생각보다 맛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받은 귤 두 알.
좋은 일이 겹치라는 의미로 짝수로 준다고 합니다.

그 작은 과일 두 개가 이 도시의 축복처럼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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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절 사자춤을 추는 행사장 입구


20260217_135430.jpg 대형 콘서트, 박람회, 명절 연회가 열리는 Setia SPICE Ar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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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세번에 걸쳐 무료로 받은 음식들


20260217_154046.jpg 춘절 상징 과일 귤(만다린 오렌지)




붉은 골목을 걷다

춘절 둘째 날, 조지타운으로 나갔습니다.

어떤 골목은 문을 닫아 텅 빈 듯 고요하고,
또 다른 골목은 푸른 하늘 아래 수많은 홍등이 걸려
완전히 다른 도시처럼 보입니다.

가게 앞에는 재물신 캐릭터 인형이 서 있고,

불교 사원과 사당 앞은
한 해의 평안을 기원하는 사람들로 붐빕니다.

향불 연기가 하루 종일 매케하게 피어오릅니다.
기도와 소망, 그리고 사람들의 기대가
연기처럼 하늘로 오르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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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타운 관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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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사 마당에도, 도교 사당 앞에도 하루종일 향불연기로 매케하다







타국에서 맞이한 설은 조금 낯설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시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폭죽 소리에 잠을 설친 밤도,
붉은 홍등 아래를 걷던 오후도,
두 손에 쥐어주던 귤 두 알의 온기도
모두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설의 얼굴이었으니까요.


우리의 설을 떠올리며 시작했지만,
결국은 페낭의 방식으로 설을 배우고 있는 시간.

한 달을 산다는 건
이렇게 다른 나라의 명절 한가운데에 서서
낯선 축복을 함께 나누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20260213_195849.jpg 환하게 밝힌 극락사 등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