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낭 한달살기(8)/기대 없이 나섰다가

Hin Bus Depot, 선데이 마켓에서 보낸 일요일

by 호히부부

[히]



구시가지 너머, 옛 버스 차고지에서

페낭에 온 지 두 번째 일요일 아침.
기왕이면 일요일에 어울릴 법한 곳을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조지타운의 복합 문화공간,

Hin Bus Depot에서 열리는 선데이 마켓입니다.


이곳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재래 아침시장이 아닙니다.
채소와 생필품 대신, 개인 창작자들의 수공예품과 디자인 제품,
핸드메이드 소품이 중심이 되는 아트 플리마켓입니다.

조지타운 구시가지의 오래된 버스 차고지를 개조해
전시와 공연, 마켓이 함께 열리는 문화 공간으로 재탄생한 곳이라고 합니다.


유럽 여행지에서 한 번쯤 마주쳤던 플리마켓과 크게 다르지 않겠거니,

그저 가볍게 둘러보고 올 생각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근처 감마 몰(GAMA MALL)에 들러
다가오는 설 연휴 동안 먹을 식재료를 살 계획도 있었구요.

크게 기대하지 않은 채 길을 나섰습니다.


20260215_114432.jpg 복합 문화공간, Hin Bus Depot


그래서였을까요.

막상 도착한 선데이 마켓은 생각보다 훨씬 생기가 넘쳤습니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마켓 부스가 펼쳐질 줄 알았는데,
먼저 넓은 실내 전시 공간이 나타납니다.

옛 버스 차고지의 구조를 크게 바꾸지 않은 채
높은 천장과 철제 기둥, 거친 벽면을 그대로 살린 전시장입니다.
잠시 걸음을 늦추고 공간에 적응하게 만드는,
일종의 완충지대 같은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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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을 지나 야외로 나오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도심 한가운데 숨겨진 정원처럼 아늑한 잔디 마당.
그 중심을 둘러싸듯 마켓 부스들이 둥글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공원이나 광장처럼 넓게 흩어져 있는 구조가 아니라,
한눈에 다 담길 만큼 자그마한 공간 안에
사람과 물건, 음악과 음식 냄새가 밀도 높게 차 있습니다.

그 밀도가 오히려 좋았습니다.
멀리 이동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걷는 동선도 자연스럽게 한 바퀴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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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들의 마켓에서 잠시 휴식

걸음이 자연스럽게 느려집니다.

유럽의 플리마켓이 오래된 전통 위에 얹힌 감성이라면,
이곳은 좀 더 젊고 실험적인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벽화와 그래피티, 자유로운 옷차림의 청년들,
라이브 음악이 흐르는 무대와 잔디 위에 앉은 사람들.

공연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광장 중앙으로 모입니다.
디저트를 들고 의자에 앉거나,
정원 가장자리에 기대어 음악을 듣습니다.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누군가는 휴대폰도 보지 않은 채 무대를 바라봅니다.


이곳은 정신없이 물건을 사고 빠져나오는 시장이라기보다,
잠시 머물렀다가 가는 공간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260215_115606.jpg 환한 웃음으로 반겨주는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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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215_121853.jpg 당당하게 한자리를 차지한, 한국 음식들을 사는 관광객







돌아오는 길, 점심과 장보기

마켓 한쪽에는 간단한 스낵과 피자, 빵, 음료, 커피를 파는 부스도 있습니다.
김밥, 잡채를 파는 한국 음식 부스 앞에서 잠시 마음이 흔들렸지만
오늘은 지나치기로 했습니다.

대신 근처 감마몰로 이동해 7층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플리마켓의 감성에서 갑자기 동네 사람처럼

현실적인 한 끼로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유명 맛집은 아니지만,
낯선 도시에서 평범한 점심을 먹는 일이
오히려 더 '사는 느낌'을 줍니다.


이틀 후면 이곳도 우리처럼 설을 맞습니다.
마트에는 붉은 장식과 선물 세트가 가득하고
연휴를 앞둔 분위기가 분주합니다.


우리도 며칠 먹을 식재료를 조금 샀습니다.

돌아오는 길, 손에 들린 묵직한 장바구니가
이곳에서의 시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합니다.

여행자가 아니라
잠시 이 동네에 머무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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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음식 매운 소스 닭튀김 밥과, 고기완자 수프


20260215_150545.jpg 설을 맞아 북적이는 구시가 감마 몰 마트


마켓을 한 바퀴 돌고,

점심을 먹고,

장을 보고나니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갔습니다.


한 달을 산다는 건,
어쩌면 이런 날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