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바라본 하루의 끝
[호]
여행지의 하루는 이상하게도 길면서도 짧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마음속에는 오래 머물 장면과 기억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며칠 전, 아내와 나는 페낭 북쪽 해안 바투 페링기에서
그런 하루를 보냈다.
한낮의 바투 페링기 바다는 활기찼다.
파도는 높지도 낮지도 않게 밀려왔고,
모래사장은 물놀이를 즐기는 사람들과,
해양 스포츠를 권하는 목소리들도 들려왔다.
형형색색의 패러세일링이 하늘로 떠오르고,
바나나 보트 위에서는 비명이 웃음으로 들려오는 듯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풍경은 부산스럽지 않았다.
발리나 푸켓처럼 거대한 리조트 풍광이 해변을 장악하지도 않았고,
비치클럽의 음악이 사람들을 유혹하듯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바투 페링기의 해변은 한껏 느슨했고,
조금 비어 있었고, 시원한 바람은 더 편안했다.
관광지라기보다 작은 바닷가 마을에 잠시 초대받은 느낌이다.
관광객들은 있었지만 넘쳐나지 않았고,
상인들의 호객 역시 집요하기보다는 남의 일처럼 담담했다.
누군가는 파라솔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누군가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여백이 이 해변을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그 소란에서 조금 비켜난 곳,
시원한 인도 아몬드(일명, 바다 아몬드) 나무 그늘 아래 놓인
간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바다를 마주한 채 앉아 있으니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코코넛을 주문하자, 칼로 윗부분을 단숨에 잘라낸 뒤 빨대를 꽂아 건네준다.
투박한 손길이었지만 그 안에는
이 해변이 오래전부터 반복해온 일상의 리듬이 담겨 있었다.
코코넛 물은 생각보다 달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지나치게 꾸미지 않은 맛이 어쩌면 바투 페링기라는 해변과 닮은 듯 했다.
여행이란 결국 이런 자연스러움 속에서
비로소 숨을 고르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코코넛 물을 마시면서, 천천히 하얀 속을 파내 먹으며
해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
젊었을 때의 여행이 목적지를 향해 달려가는 일이었다면,
지금의 여행은 어디를 더 봐야 한다는 조급함 대신,
한 장면이 완성되기를 가만히 지켜보는,
시간을 기다리는 일에 더 가까워 진다고 할까.
오후의 빛이 서서히 부드러워지자 해변의 풍경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강렬하던 햇살은 금빛으로 풀어졌고, 바다는 낮보다 깊은 색을 띠었다.
관광객들로 가득 찬 유명 휴양지였다면
이 시간쯤 되면 음악과 파티로 채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아이들은 모래성을 정리했고,
산책하던 사람들은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해가 지는 순간을 방해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우리는 해변에 내놓은 식탁보가 깔린 작은 식당 자리로 옮겼다.
나시 고랭을 주문하고 한 가지 음식을 더 곁들였다.
여행지에서의 식사는 맛이 아니라 분위기가 먼저이다.
요란한 음악 대신 파도 소리가 더 크게 들리고,
인공적인 이벤트 대신 하루의 햇빛과 바람이 시간을 채워주는,
이곳은 바투페링기 해변이었다.
해가 수평선 가까이 내려왔을 때, 해변은 잠시 말을 멈춘 듯 고요해졌다.
붉은 빛이 바다 위로 길게 펼쳐지며 하루가 천천히 접히고 있었다.
모두들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고,
나 역시 몇 장을 남겼다.
하지만 어느 순간 사진 찍기를 멈추고 그냥 바라보기로 했다.
기록하려는 마음보다 느끼고 싶은 마음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해가 완전히 사라지자 해변의 색은 빠르게 밤으로 넘어갔다.
낮의 열기는 식고, 조명들이 하나둘 켜졌다.
낮에는 바다가 주인공이었다면,
이제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길거리 음식 천국인
거니 호커 센터에 들렀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뒤섞여 앉아 있는 그 공간은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수많은 페낭 전통 음식들중에 엄선해서(?)
굴요리를 하나 주문하고 시원한 맥주를 곁들였다.
첫 모금을 넘기는 순간,
하루의 피로가 아니라 하루의 충만함이
목을 타고 내려오는 느낌이 들었다.
오늘 바투페링기 해변에서
코코넛을 마시던 시간,
붉게 물들던 바다,
모래 위 식탁에서의 저녁,
그리고 이곳의 마지막 맥주 한 잔까지.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그래서 더 편안한 하루였다.
여행을 오래 하다 보니 깨닫게 된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는 새로운 풍경이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함께 바라볼 사람이 더 중요해진다는 사실을.
바투 페링기의 일몰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을 기억은
그 풍경을 아내와 나란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파도는 어제와 다르지 않게 오늘도 밀려오고 있을 것이다.
해는 또다시 지고, 누군가는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하루는 단 한 번뿐이었다.
그래서 여행은,
결국 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