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을 따라 나섰다가, 발길이 이끈 프라하의 풍경들
[호]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면
그날의 목적지를 정하고 출발한다.
하지만 막상 걷기 시작하면
처음 마음먹은 길로 끝까지 가는 일은 드물다.
한달살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길을 걷다 보면 자꾸 다른 길이 궁금해지기 때문이다.
오늘도 아파트 숙소에서 출발해
스트라호프 수도원 앞을 지나,
프라하 성과 네루도바 거리를 거쳐 카를교를 건넌 다음,
구시가를 지나서 바츨라프 광장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도보로 약 한 시간 남짓한 거리다.
집 앞 도로까지는 무난하게 걸어왔지만,
찻길 옆으로 난 산길이 눈에 들어오자
또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한다.
가볍게 이어지는 오르막길 덕분에 출발은 상쾌하다.
나무가 우거진 길을 따라 오르다 보니
뜻밖의 풍경이 나타난다.
언덕 위에 커다란 스타디움과
헬스장, 수영장 같은 운동시설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수영장 사진이 눈에 들어와 잠시 들여다보았지만
사람 기척은 없다.
아마 일요일이라 그런 듯하다.
평일에 다시 한 번 와서 수영을 해보기로 하고
오늘의 목적지인 구시가 방향을 다시 찾아보는데
너무 위쪽까지 올라온 탓인지
블타바 강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쉽지 않아 보인다.
잠시 망설이다 버스를 타기로 했다.
한 달짜리 교통패스가 있으니 어디로 가든 크게 상관은 없다.
프라하에서 버스를 타는 건 처음인데,
트램과 마찬가지로 슥 타고 내리는 느낌이 묘하게 가볍다.
2014년 6월, 미국 뉴욕 맨하탄에서 한달살기를 했을 때도
112달러(당시 환율 약1,200원= 134,400원)를 내고 한달짜리 메트로 패스권을 구입해서 다녀보았지만,
무제한 승차가 가능한 이런 정기권이 무척 편리하다.
여기 프라하에서는 특히 (지하철처럼 지하로 내려가지 않아도 되는) 지상 트램을
손쉽게 타고내릴 수 있어서 자가용 승용차보다 더 편리한 느낌이다.
그런데 어제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22번 트램에서 처음으로 검표원을 보았다.
제복이 아니라 사복 차림이라 눈에 띄지 않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씩 승차권을 확인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엔 누구나 자유롭게 타고 내리는 것 같지만,
막상 그 순간이 되자 사람들은 모두 자연스럽게
정기권이나 승차권을 꺼내 보여준다.
우리도 한 달짜리 패스를 내밀었다.
그렇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도시의 질서는 조용히 유지되고 있었다.
버스는 내가 바라던 방향이 아니라
도시 외곽으로 점점 더 멀어져 간다.
이럴 땐 그저 버스가 가는 대로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다.
‘어디로 가나?’ 하며 불안해 해봐야 소용없기 때문이다.
내가 모르는 프라하에서 한달살기를 시작한 터에
버스 바퀴가 가는 대로 발길을 둬야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할 터이다.
한달이란 시간이 주어진 ‘정주형(定住形) 여행자’에게
잠시 궤도에서 벗어난 일탈의 시간이 무슨 대수랴?
내게는 무제한 교통카드도 있거늘.ㅎㅎ
버스는 난생 처음 보는 프라하 외곽 풍경 속으로
점점 더 깊이 들어간다.
나무가 우거지고 파란 잔디밭이 이어지는 가을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한가롭게 휴일을 보내고 있다.
버스에서 내려 그 풍경 속으로 함께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오늘은 조금 더 가보기로 한다.
마침 트램길이 보여 정류장에서 내렸고,
잠시 기다리자 구시가 방향으로 가는 22번 트램이 도착한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 반을 돌아
다시 집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빙 돌아온 셈이지만 이상하게도 허탈하지는 않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트램을 계속 타고 가다
까를교 근처에서 내렸다.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 주변을 잠시 둘러보고,
까를교를 천천히 걸으며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다시 구시가 입구에서 22번 트램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래 사진들은 발길 닿는 대로 걷다 구시가에서 마주한 풍경들이다.
돌아보면, 우리는 그날 길을 잃은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넓게 새로운 길을 걸어본 것이었다.
일제 치하의 윤동주는 '새로운 길'을 이렇게 표현했다.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나 또한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오늘도... 내일도...
나의 길은 늘 새로운 길이다.^^
*이 글은 체코 프라하 한달살기 중(2019년 가을), 가족 카페에 실시간으로 남겼던
기록을 바탕으로 지금의 생각을 때때로 덧붙여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