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벨시장의 아쉬움, BILLA에서 시작된 일상
[히]
프라하 도착 3일째.
오늘은 프라하에서 ‘즐거움이 가득한 노천시장’으로 알려진
하벨시장을 가보기로 했다.
노천시장이라고는 하지만,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야외 선물가게쯤으로 보면 된다는 글도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1232년에 시작된, 역사가 어마어마한 시장이 아닌가.
우리가 사려는 물건쯤은 있겠지 싶어 시장부터 들러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날이 추워 당장 장갑과 두꺼운 모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달살기를 하러 왔다지만,
그래도 여행을 와서 관광지를 제쳐두고 시장부터 찾는 일은
어쩌면 ‘한달’이라는 시간이 주는 느긋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여행이 아니라 조금씩 이곳의 일상에 들어가고 있는 하루다.
오늘도 하벨시장으로 걸어가는 길,
구시가 주변에서 만난 풍경들이 조용히 마음속으로 스며든다.
계획하지 않았기에 더 좋고,
걸어야만 얻어지는 순간들이라 더 즐겁고 고맙다.
이 길을 걷는 동안만큼은, 어디로 가는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드디어 하벨시장 입구에 도착했다.
‘1232년’이라는 숫자가 간판에 또렷이 붙어 있다.
그런데 어랍쇼?
인터넷 정보대로, 규모가 작아도 너무 작다.
현재까지 보존된 야외 상설시장이라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것처럼 이 끝에서 저 끝까지가 전부다.
예전에는 석탄시장으로 운영되었다고 하고,
지금은 소규모 과일과 채소, 그리고 각종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시간은 오래 되었지만, 지금의 모습은 아주 단순했다.
기대가 컸던 만큼, 허전함도 함께 남는다.
관광객들이 한 번쯤 들러 기념품을 사갈 만큼
가격이 저렴하다고는 하지만,
프라하에 온 지 3일째인 우리로서는
물가 비교도 쉽지 않고, 선물 살 일도 없다.
게다가 우리가 찾던 모자와 장갑은 시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순간,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ㅎㅎ
여행지에서 할 일이 없다는 것도, 의외로 낯선 경험이다.
하벨시장 안 노상카페에서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를 한 잔씩 마시며
잠시 생각을 정리해본다.
그동안 여러 도시에서 한달살기를 하며
재래시장과 대형마트를 기준으로 현지 물가를 가늠해왔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도시에 오면 자연스럽게 시장부터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프라하는 구경하는 시장은 있어도
생활을 위한 시장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느낌이다.
아직은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도시는 ‘보는 곳’과 ‘사는 곳’이 조금 나뉘어 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그렇다면 이왕 나온 김에
어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눈여겨 봐두었던
아파트 주변 거리를 다시 가보기로 했다.
혹시 큰 마트가 있는지 조금 더 둘러볼 생각이다.
사람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뭐 하나쯤은 있지 않겠는가.
역시, 있었다.
어제는 야채가게만 보았는데 조금 더 걸어가니
우리가 찾던 마트가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다.
관광지보다, 이런 곳에서 더 안도감이 든다.
기대했던 하벨시장이 아쉬웠던 터라 더욱 반갑고 기뻤다.
프라하에서 한 달을 살며
일용할 식재료를 마음 편히 구할 곳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된 기분이다.
이제야 비로소 여행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오늘 찾던 모자와 장갑은 없었지만
그건 차차 또 알아보기로 하고ㅎㅎ
마트 안으로 들어가 본다.
낯선 도시에서 가장 먼저 익숙해지는 곳은, 늘 마트다.
어디를 가나 비슷한 풍경이지만 이곳에서는 그 익숙함조차 반갑다.
진열된 빵을 바라보니 군침이 절로 돈다.
아기가 빵을 참 맛있게 먹고 있어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사진을 찍어도 될까 싶어 망설이다가,
그저 눈에 담아두기로 했다.
체코에서 유명하다는 소시지와 치즈들도 가득한데
문제는 뭘 사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
이럴 때 쓰는 방법 하나.
눈 딱 감고 하나 집기!
의외로 성공률이 높다.ㅎㅎ
그리고 드디어 만난 주류 코너.
드디어 새로 산 반찬통에 음식들을 담아 냉장고에 차곡차곡 넣는다.
한 집에 살고 있는 인도인과
냉장고를 함께 쓰다 보니 은근히 신경이 쓰였던 터였다.
음식들이 가지런히 들어찬 냉장고를 보니 마음이 조금 놓인다.
프라하에서의 한 달도 이렇게 하나씩 채워가며
조금씩 ‘사는 시간’으로 바뀌어갈 것이다.
*이 글은 체코 프라하 한달살기 중(2019년 가을), 가족 카페에 실시간으로 남겼던
기록을 바탕으로 지금의 생각을 때때로 덧붙여 정리한 글입니다.
[히]
한달살기를 편안하게 이어가기 위해서는
숙소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큰 것 같습니다.
프라하에서는 한 아파트에 두 팀만 머무는
쉐어하우스(공용 주방, 공용 화장실)에 묵었는데,
그때 한 가지 불편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공용 공간을 유난히 어지럽게 쓰던 동거자들로 인해
매일같이 마음을 다잡아야 했던 날들이었지요.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게스트하우스보다
오히려 두 팀만 지내는 쉐어하우스에서는
함께 사는 사람을 잘 만나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그 이후로는 한 달 살기 숙소로 쉐어하우스를 선택한 적이 없습니다.
위치나 가격도 물론 중요하지만,
조금 불편하더라도 마음이 편한 단독 공간을
우선으로 두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