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신이 다 관여할 수 없어 엄마를 내려 보냈다 했다.
엄마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내게 비빌언덕이 되어주었고 나는 그런 엄마를 영원히 가질 것 마냥 군다.
엄마는 내게 자신이 부서지도록 내어준다.
심지어 나의 자식에게까지
나는 참 양심도 없이 칠순이 된 노모가 아직도 젊은냥 싶다.
얼마 전 옷을 보러 갔을 때도 그렇게 여성복 코너를 돌며 옷을 봐주었다. 젊은 애들이나 입을법한 옷을 한참 입어보다 결국엔 등산복 브랜드에서 패딩을 구입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직 그 칸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최근에는 요양병원에 계시는 나의 엄마의 엄마에게 다녀왔다. 그이는 예전의 풍채와 오징어먹물로 염색하던 그 꺼뭇하고 꼬불대던 머리칼은 다 잘라버리고 희고 짧은 모습을 하고 주무시고 계셨다.
그곳에 모신 지 여섯 달.
더 이상 거동이 불편해져 화장실에 가실 수 없고
그곳에서 넘어지기까지 해 부득이한 결정이었다.
그 많은 자식들도 다 환갑이 넘었기에 98세 노모를 모시기란 힘에 부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병실에 들어선 우리를 보았을 때는
‘이 사람들이 누구지?’ 싶으셨나 보다.
한참을 보셔서 결국 우리는 자기소개를 했다.
그제야 손녀가 온 것을 알고 할머니는 우리에게 이것저것을 권했다.
그러나 그 순간도 잠시,
나의 언니에게 “시집가야 되는데 안 가서 어쩌냐”
나는 기회를 놓칠세라 우리 형부를 소개하며
“이 사람이 신랑 될 사람이에요” 했다.
우리 언니는 15년 전에 결혼했는데..
할머니는 다 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형부에게 “바쁜데 어떻게 왔어”를 세 번이나 물었다. 사람 좋은 우리 형부는 그때마다 ”할머니 뵙고 싶어서 왔 “ 다고 했다.
그러다 이내 “나는 집에 못 갈 것 같아” 라며 서글프게 우셨다. 할머니가 그렇게 서글프게 우시는 것은 처음 봤다. 아마 할머니도 만으로 96년 인생에 손주들 앞에서 그렇게 목놓아 우는 자신을 상상도 못 하셨겠지.
우리는 “얼른 나아서 집에 갈 수 있지, 할머니 다 나아서 집에 가면 맛있는 거 해줘, 할머니 갈비랑 게장이랑 먹고 싶어” 했다.
할머니도 우리도 다 알고 있었다.
모두 할머니에게 집에 갈 수 있다고 거짓말했지만,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할머니 이야기를 했을 땐 엄마는 몹시 슬퍼했고 죄스러워했다.
할머니가 조금만 더 가벼우셨으면 홀로 된 자신이 모셨을 텐데 라며, 자식들에게는 속상할까 봐 그런 얘기를 하지 않으신다며
칠순이 된 나의 엄마는 더 늙은 노모를 자신이 책임지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운 모양이었다.
하긴,
나였어도 그랬겠지.
자식이 있고 부모가 있는 지금,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일까.
언젠가, 늙은 부모에게 기댈 자리가 되어줄 수 있을까
내 필명의 ‘남궁’은 엄마의 엄마 성씨다.
나는 그 이름을 오래 붙들고 싶었다.
누군가의 엄마였고, 누군가의 딸이었던 사람을
조금 더 오래 남겨두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