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뱀파이어 탈출기

감정 쓰레기통이 되지 않기

by 호호엠이

결혼을 늦게 한 친구가 있다.
사실상 내가 이어 준 인연이었다.
연애 중 위기도 있었지만 붙잡아줬고,
결혼 후에는 남편의 경제력도 안정적이어서
그 친구는 바로 일을 그만두고 잠시 쉬다가 아이를 가졌다.

그때부터 친구는 자주 울었고,
산후 우울증, 불면, 통증, 불안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나는 들어줬다.
시댁 이야기, 남편 이야기, 주변 사람들 욕…
처음엔 위로였지만, 나중엔 숨도 쉬지 않고 쏟아내는 분노였다.

나는 그 친구가 무너지는 게 안타까워 계속 들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조언도 해보고
상담도, 바우처도, 유튜브도, 책도 소개해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그건 지금 내겐 부담스럽다”는 말,
그리고 더 격해진 감정들뿐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너무 격해진 말들을 듣다가
“잠깐 진정하자”고 말했다.
그랬더니 친구는 오히려 나를 향해 소리를 높였다.
"왜 내 말을 끊냐고.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그때 알았다.
이건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걸.

나는 조용히 말했다.
“네 마음은 이해해. 하지만 이건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해 보여.
더는 나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아.
그래도 식사하거나, 차 마시는 건 언제든 좋다.”

친구는 아마 서운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말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보면, 그 친구는 고통에서 벗어나기보다는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계속 증명하려는 데 머무는 것 같았다.
특히 오랜 친구들로부터 받은 상처 이야기를
몇 달째, 거의 같은 말로 반복했다.


누군가 그 고통을 완전히 인정해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 반복 안에는 무의식적인 이득도 있었다.
‘아직 회복되지 않은 사람’이라는 입장에 머물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정당함을 얻을 수 있었다.
살림과 육아에 충분히 참여하지 않아도,
시댁을 회피해도,
남편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애꿎은 비난을 해도
“나는 아직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말 한 마디로 모든 게 설명되곤 했다.

처음에는 그 반복이 필요하겠거니 했다.
하지만 반복이 깊어질수록,
그 친구는 ‘과거의 고통’ 안에 자신을 가두고 있었다.
나조차 점점 과거에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었고,
무력감이 깊어졌다.


어느 날엔 자신의 과소비와 카드빚, 금전 문제까지
넌지시 내게 털어놓았다.
그게 자신의 유일한 해방구라며,
스트레스를 견디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 설명했다.
솔직히 나는 궁금하지도 않았고,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로 느껴지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굳이 내게 그 사실을 알려주려 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 불편해졌다.
무언가를 *“말해버리는 것”*으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받으려는 듯한 느낌.
“너도 알았으니까, 이젠 이해해줘야 해”
라는 무언의 부담이 느껴졌다.


---



그리고,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며
다른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그 모든 원인을 타인 탓으로 돌렸던 사람.
책임지지 않으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감정의 파편을 흩뿌렸던 사람.
그 사람은 내게 오랜 시간 상처를 남겼고,
그 기억은 내 안에 여전히 잔상처럼 남아 있었다.

아마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그 친구에게 느낀 실망감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오래된 감정의 무게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사람은 서로 도울 수 있지만,
서로의 무너짐까지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걸.
감정을 들어줄 수는 있지만,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나는 더 이상 감정적으로 불균형한 관계 안에 있고 싶지 않다.
서로 기댈 수 있고,
햇살 좋은 날 산책하듯 편히 마주할 수 있는 관계가 좋다.
힘든 얘기만 반복되지 않고,
조용히 함께 웃을 수 있는 그런 사람.

상처는 말할수록 치유되는 게 아니라,
계속 그 안에 머무를 때 더 깊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안에 더 오래 머물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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