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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가 안주인 Apr 05. 2022

이런 집에 살고 싶다


숯불 피우고 연기 자욱한 허름한 고깃집에 뾰족구두와 타이트한 원피스 차림은 거북하다. 기름때로 미끌미끌한 바닥에 구두굽은 치명적이고, 불편한 의상은 잘 익은 고기를 양껏 먹기에 방해만 될 뿐이다. 앞치마를 목에 걸어봐도 안락함을 얻기에 턱 없이 부족. 바라보는 사람들도 덩달아 속이 턱 막혀 이내 부담스러워진다. 발바닥이 땅에 딱 붙는 운동화와 두 다리 널찍한 바지, 반찬 얼룩과 냄새가 배어도 물빨래 한 번이면 단번에 해결되는 편한 옷이 제격이다. 이처럼 공간과 사람은 상호작용하며 서로에게 맞는 접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


노릇하게 구워진 고기에 파채를 얹고 마무리로 맥주를 들이켜는 순간


집도 마찬가지다. 집이 지닌 기둥과 천장과 바닥, 벽, 공간구성은 보기보다 강압적이다. 그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건물의 뼈대'에 맞춰 살아야 하기 때문. 전형적인 예가 바로 아파트다. 집에서 가장 큰 방은 자동적으로 안방이 되고 그 안엔 화장실이 있다. 넓게 트인 공간은 거실이 되어 소파와 TV를 놓아야 하고. 어스름한 저녁, 밖에서 아파트를 바라보면 전 세대가 비슷한 그림자를 그리고 있다.



도시에선 모두가 같은 형태의 삶을 살고 있다


집이 정해주는 대로 살지 않고 '우리가 사는 대로' 집을 만들어가면 어떨까. 잠만 자는 안방은 굳이 클 필요가 없고, 탁 트인 거실은 멋진 오피스가 될 수도 있다. 국룰처럼 정해진 '국민의 집'에서 탈피해 진정으로 '나를 위한 집'으로 변화가 필요한 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꽤 되는지, 월세로 지낸다 해도 과감히 인테리어를 싹 뜯어고쳐 본인의 라이프스타일을 완성하는 이들도 있다. 어찌 보면 돈 낭비일지 모르나 잠시 머물러도 행복을 느끼며 살겠다는 주체성은 분명 멋지다.

​그 안에 '누가 사느냐'에 따라 '어떤 집'이 만들어지는지 결정된다. 딩크족 부부에겐 아이라는 영역이 사라져 여러 제약에서 자유롭고, 어르신을 모시고 사는 집이면 내부 동선이 간결하고 단조로워야 할 것이며 반려동물을 키우는 이들은 그에 맞는 환경을 조성해 줘야 한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사적 공간이라는 개념에서 한 발짝 더 들어가보자. 온 가족이 한데 엉겨 삶의 역사를 기록하는 곳이 집이라 여기면 나에게 주어진 집을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값지다.

​호호가는 어떤 집이어야 할까. 집을 짓는 이유에 대해 생각하니 그다음은 우리가 살 집은 '어떤 모습'일지다. 가족 구성원의 라이프스타일을 정리하고, 저마다 원하는 요소들을 나열했다. 그리고 희망하는 전반적인 집의 느낌을 적었다.





호호가 구성원 성향 보고서


전업주부인 나는 식물 가꾸기, 꽃꽂이,
요리, 독서, 영상 만들기가 취미다.
인테리어 디자인과 소품,
책과 사진에 관심이 있으며
보사노바풍의 음악을 좋아한다.
대체로 조용하고 정적인 분위기를 선호.
냄새와 소리에 민감한 편이다.​


IT업계 회사원인 남편.
나와는 많은 면에서 대조된다.
사이클과 헬스, 골프와 축구를 즐기며
스포츠와 차에 관심이 많다.
(그런 남편 덕에 나 또한 사이클을 시작했고, 태교로 EPL 새벽 경기를 챙겨 봤다)
힙합과 R&B를 자주 듣고, 활동적이다.
음악을 듣거나 TV를 볼 때
소리를 크게 틀어두는 걸 좋아한다.


이제 곧 둘이 될 아이들.
둘째 성별을 아직 모르지만
연년생이라 친구처럼 클 것 같다.
초등학교 입학 전까진 홈스쿨링을 할 예정.
집 앞 마당을 놀이터 삼아
신나게 놀았으면 좋겠다.



가을날 호호가 터
매번 집터에 올 때마다 마음이 좋다


우선 나만의 작업실이 있었으면 한다. 추후 이곳에서 여러 활동들을 계획 중이다. 넓은 오픈형 주방 선호, 상부장은 싫다. 많은 식기류 수납공간, 최소 6인 식탁 수용 가능한 오픈형 주방. 넉넉한 팬트리 공간, 모든 가전 및 살림살이가 수납 형식으로 가려졌으면 한다. 세탁실은 생활공간 근처거나 이동이 번거롭지 않았으면 한다. 안방은 크지 않아도 되며 딱 잠만 잘 수 있게 침대만 있으면 된다. (자는 공간은 빛과 소음으로부터 방해받지 않았으면...!) 마당의 화단 외에 식물을 집중적으로 둘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드레스룸이 컸으면 좋겠다 (통상 아파트 작은방의 두 배 정도의 크기)


남편에겐 집 내부와 연결되는 차고가 필요하다. 주차와 더불어 이곳에 운동 공간(헬스기구와 사이클)을 둘 예정. 재택근무를 위한 서재. 독립된 위치에 있었으면 한다. 소음을 싫어하는 부인을 피해 서재나 차고에서 음악과 영상을 크게 틀길 꿈꾼다. 화장실엔 샤워부스와 비데 필수. 건식 화장실을 희망하나 욕조도 있으면 좋겠다. 공간감 있을 정도의 넓은 거실. 실링팬 설치. 각 방마다 시스템 에어컨 설치. 집의 공기 순환을 위해 환풍시설 설치.


흙 다지기 작업을 하기 전 비가 내렸다. 발이 푹푹 빠져 검정 비닐봉지를 덮신처럼 신었다.

하자가 없는 집을 만드는 게 가장 기본적인 목표다. 누수와 결로가 없어야 하며 단열이 잘 되는 집 말이다. 큰 산업시설을 지을 게 아니기 때문에 경량 목조주택을 생각 중이다. 처음엔 철콘(철근콘크리트)을 고려하다 아이들 건강과 피부에 좋은 목조주택으로 마음을 굳혔다. 집의 뚜껑이 평평하면 누수의 위험이 커지기에 빗물이 잘 떨어지도록 박공 지붕을 계획 중. 깔끔하고 딱 떨어지는 느낌이었으면 좋겠다.


- 외장: 한 가지 자재로 전체 마감

- 내부: 무몰딩, 히든 도어, 많은 수납장​




따뜻함이 깃든 집이 되었으면 좋겠다. 볕이 잘 들고, 내부 톤을 통일시킬 거다. 우선 자연채광이 잘 되어야 한다. 현재 사는 집도 채광이 좋아 집의 분위기가 정말 좋다. 그 안에 사는 사람도 식물도 행복지수가 커지는 중요한 포인트다. 따뜻한 느낌이 들려면 소재와 컬러를 적절히 조화시켜야 하는데, 나무와 상아색이 좋다. 바닥은 어둡지 않은 채도의 헤링본이나 모래색에 가까운 포셀린 타일을 고민하고 있다. 콘센트와 스위치에 이질감이 들지 않도록 벽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하고 싶다.​​


최소 3m 이상의 높은 층고를 희망한다. 1층은 공용공간 2층은 사적 공간으로 쓸 수 있는 이층집을 지을 거다. 형광등은 꼭 필요한 곳에만 설치하고 간접조명을 달 생각이다. aesop 매장을 떠올리면 이해가 쉽다. 외부에서 봤을 땐 폐쇄적인 집이되 내부에서는 개방감을 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아파트 느낌이 전혀 나지 않았으면 한다.




나를 잘 아는 것만큼 귀한 일이 있을까


기성복이 아무리 잘 나온다 해도 '맞춤옷' 마니아층은 두텁다. 편리성과 가격의 합리성을 뒤로하고 굳이 시간과 번거로움을 들이는 이유는 뭘까. 내 몸에 꼭 맞는, 나만을 위한 복장에서 오는 희열, 다시 말해 '나를 잘 알아가는 과정'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지 않을까. 우리 가족에게 꼭 맞는 집, 호호가를 지을 준비가 시작되었다. 무엇을 빼고 더할지 앞으로 끊임없이 고민해 볼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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