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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로 Nov 19. 2020

류근이

<내 친구 이야기>

-다시 태어나도 친해지고 싶은-



*

나는 예쁜 아이만 좋아한다. 내 기준에 예쁜 아이는 모든 여자아이와, 차분하고 예의 바르고 먹을 것을 친구나 동생에게 나눠주고 존댓말을 쓰는 남자아이다. 조카를 비롯해 내가 만났던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은 장난꾸러기에 자기중심적이며 예의 바르지 않았다. 결혼해서 남자아이를 낳으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입양 보낼 거란 얘기를 서슴지 않게 했다. 물론 기우였다. 결혼은커녕 연애도 요원한 날들이 일상이 된 지 오래니까. SNS에 아들 사진을 올리며 이렇게 귀여운데 좋아요 안 누를 거야, 라고 묻는 게시물을 보면 좋아요를 누르지 않았다. 솔직히 안 귀여웠다. 내 자식 남 자식을 떠나서 개나 고양이가 귀엽지, 키즈 모델급 외모가 아닌 이상 남자아이는 안 귀여웠다. 모든 여자아이는 예쁘든 못생기든 인형처럼 다 귀여웠지만. 독거 중년 전 단계인 노총각 시절에 결혼식보다 더 안 내켰던 자리가 돌잔치였다. 내 눈에는 그냥 평범하고 흔한 외모의 아기인데, 귀엽다, 예쁘다, 갖은 칭찬들을 연발해야 하는 자리. 누군가에게는 쉬운 자본주의 미소 짓기가 나에게는 어려웠다. 프리랜서 카피라이터로서 한창 바쁘게 일하던 시절, 한해의 마지막 날에 일성이가 출산 소식을 알려왔다. 거래처 기획사를 돌며 하루에 서너 건의 회의를 하고 수십 통의 전화를 받으며 바쁘게 살던 때라, 그날도 어김없이 컴퓨터 앞에서 끙끙대며 카피를 쓰고 있었다. 남들처럼 결혼해서 애를 낳았을 뿐인데, 하던 일을 멈추고 그대로 달려가야 할 만큼 놀라운 소식이었다. 나는 차에 타서 일성이가 알려준 산후조리원으로 부리나케 액셀을 밟았다.     


*

일성이네 집 근처에 있던 산후조리원은 시설이 썩 좋지 않았다. 드라마 같은 데서 본 산후조리원은 밝고 깨끗했는데, 일성이와 제수씨, 아기가 있는 산후조리원은 어둡고 낡아서 흡사 양가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몰래 애를 낳은 느낌이었다. 검소함의 발로였어도 괜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아, 일어나지 마세요. 제수씨, 축하드려요!”

“그래도 가장 먼저 달려와 주시네요.”

“일성이가 아빠가 되고, 세상에 별일이 다 있네요. 흐흐”

“비로소 진짜 어른으로 거듭난 거지. 앞으로 형이 나랑 겸상해도 될랑가 모르겠네.”

“애 이름이 뭐야?”

“강류근!”      


불과 여섯 시간 전에 태어났다고 했다. 아기가 엄마, 아빠 외에 처음 보는 사람이 나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제수씨에게 건네받은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아서 찬찬히 눈 맞춤을 했다. 안자마자 울음을 터뜨릴 거란 예상과 달리, 아기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신기하게 생긴 이것은 무엇, 하는 표정이었다. 내가 지어야 할 표정을 생후 여섯 시간 차 아기가 짓고 있는 것이 우스웠다. 강아지도 눈을 뜨려면 며칠이 걸리는데 사람은 태어나자마자 눈을 뜨나. 신비로울 따름이었다.     


“하하하! 얘, 내가 신기한가 봐. 울지도 않고 계속 쳐다봐. 하하하!”     


보고 있자니 자꾸 웃음이 나왔다. 평범한 남자아이가 될, 키즈 모델급 외모도 아닌 아기가, 일성이의 아들이란 이유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엄마를 닮았는지 아빠를 닮았는지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던 다른 아기들과 달리, ‘대굴빡’까지 쏙 빼닮아 영락없는 일성이 주니어였다. SNS에 아기 사진을 주구장창 올려대는 사람들이 조금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

일성이는 십 년 넘게 학원 광고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기획사의 대표이다. 카피도 본인이 직접 쓰는 카피라이터이자, 광고 캠페인 기획 및 광고주 핸들링도 하는 AE이기도 하다. 말하는 거 좋아해 대학에 한 학기 출강을 한 적도 있고, 학원장들 상대로 하는 특강도 자주 한다. 한 마디로 교육 전문가란 소리다. 친한 친구들끼리 부부 동반(나는 애인 동반!)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던 적이 있는데, 일성이는 밤에 부인들을 모아놓고 입시 교육이나 학군, 성적 등에 대한 주제로 열변을 토했었다. 대부분 초등학생 자녀를 둔 부인들은 평소 자녀 교육에 대해 궁금했던 것들을 물으며 분위기를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나는 일성이가 류근이 교육을 어떻게 시킬지 궁금했다. 류근이가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일성이와 술을 마시다 안부를 물은 적이 있다.     


“류근이는 잘 지내? 학원은 좀 보내냐?”

“아니. 배우고 싶은 게 없나 봐. 노는 게 좋대. 에휴. 한숨만 나오네.”

“미혼 주제에 충고할 자격은 없다만, 그래도 싫다는데 억지로 학원 보내고 그러지는 마라!”

“억지로는 안 보내지. 류근이는 우리 아파트에서 5분 대기조야. 또래 친구들이 다들 한두 개씩 학원을 다니니까 놀다가 사라지고 그러는데, 류근이는 놀자고 부르면 항상 콜이야. 늘 집에서 대기하고 있는 걸로 소문이 다 났대. 큭큭. 이 놈 놀다 학원 가면, 학원 다녀온 저 놈 와서 놀자고 하고, 류근이는 계속 놀기만 해.”

“좋네!”     


일성이는 초중고 각 학년별로 어디 학원에 보내고 어떤 공부를 시켜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교육 전문가다. 나는 일성이가 회사 일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류근이 교육도 전문가답게 잘 시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깜짝쇼는 일성이의 전매특허지만 나도 영향을 받아 그런 적이 있다. 칠팔 년 전의 크리스마스 시즌으로 기억한다. 티라노킹이란 장난감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구하기가 힘들어 칠만 원짜리 티라노킹이 이삼십만 원에 거래된다는 기사를 얼핏 봤던 것도 같다. 류근이도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아빠 조르기 대열에 동참했고, 일성이는 동분서주하며 티라노킹을 구하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이마트 홈페이지에서 티라노킹 온라인 판매가 예고된 날, 회식을 걸고 전 직원에게 ‘광클’을 부탁해도 티라노킹을 구할 수 없었단다. 상술에 놀아나지 말라며 평소처럼 핀잔을 주기에는, 유난히 축 처진 어깨로 술을 마시는 일성이가 보기 딱했다. 류근이에게 티라노킹을 선물할 수 있도록 일성이에게 티라노킹을 선물하자. 어쩌면 술기운에 혼자 한 다짐이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내가 사는 곳 근처의 롯데마트 매장에서도 티라노킹 선착순 판매 광고가 떴다. 8시 판매 시작. 나는 깜깜한 새벽 6시에 롯데마트에 갔다. 이미 누군가의 산타클로스 몇십 명이 줄을 서 있었다. 혹한의 날씨에 두 시간 동안 기다려 장난감을 사는 행위를 내가 할 줄은 몰랐다. 마트에서 만난 대부분의 아줌마, 아저씨들은 자식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위해 ‘유난 떠는 사람들’이 되는 것을 자처했는데, 나는 생전 처음 보는 그분들과 오직 티라노킹이란 주제 하나로 두 시간 동안 즐거운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언제 나오셨어요?”

“저는 다섯 시 반에 나왔어요.”

“이 장난감을 아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나 봐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마누라가 깨우더니 내쫓던데요. 못 사면 들어오지 말라고.”

“요즘 이 장난감 안 사주면 아빠 대접도 못 받을 걸요?”             


아이폰을 사거나, 공짜 커피를 받거나, 생수회사의 판촉 룰렛을 돌리기 위해 줄을 서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롯데마트 직원 몇 명은 새벽부터 나와 따뜻한 녹차와 커피를 타 주었고, 아침잠을 설치고 나온 사람들의 표정에는 이미 크리스마스가 도착한 듯 보였다. 어쩌면 그들은, 또한 나는 과거의 어렸던 자신에게 선물하는 마음으로 줄을 서지 않았을까? 일성이를 위한 깜짝쇼마저 일성이 덕분에 행복한 추억이 되었다.      


*

류근이를 마지막으로 본 건 이삼 년 전이다. 제수씨에게 주말 휴가를 주기 위해 일성이가 류근이를 데리고 내가 잠깐 머무르던 강릉으로 낚시여행을 왔었다. 오랜만에 본 류근이는 일성이를 70% 축소 복사한 개구쟁이가 되어있었다. 즐겁게 낚시를 한 다음날, 일성이와 류근이가 서울로 올라가기 전에 순대국밥집에 식사를 하러 갔다. 돈가스 같은 걸 먹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일성이에게 물었지만 자기랑 식성이 똑같아서 상관없다고 했다. 한동안 채소 반찬 위주로 밥을 먹던 류근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한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아버님! 고기를 좀 먹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초등학교 4학년짜리의 넉살이 귀여워 류근이의 두툼한 볼살을 살짝 꼬집었던 것 같다. 류근이는 과연 먹성이 좋았다. 전날 밤에 술을 많이 마신 일성이와 나는 순대국밥을 제법 남겼는데, 류근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맛있게 먹다가 급기야는 국밥 그릇을 받침에 걸쳐 기울이는 아저씨 스킬까지 사용하며 국물까지 싹싹 비웠다. 일성이는 흐뭇한 듯 민망한 듯 예의 또 그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류근이를 바라봤다. 나는 류근이를 산후조리원에서 처음 봤을 때처럼 크게 소리를 내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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