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이야기>
-다시 태어나도 친해지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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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건 다이어트 때문이었다. 사십대가 되고부터 배가 불러오기 시작했고, 임신은 아닌 것 같아 살을 빼기로 한 것이다. 시작은 쉽지 않았다. 몇 백 미터 달리지 못하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도저히 계속 달릴 수 없었다. 그렇게 한 번 걷고 나서 다시 달리면 콘크리트 바닥이 갯벌로라도 변한 것처럼 다리는 더 천근만근이었다. 고등학교 삼 학년 때 체력장 준비로 1000미터 몇 번 뛴 것이 장거리 경험의 전부였으니, 당시의 나는 오래 달리는 방법 자체를 몰랐었다. 선천적 끈기 부족까지 더해져 흐지부지 되려던 찰나에, 군대 시절 알게 된 마라톤 마니아 지인과 여의도 공원을 뛸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서 처음으로 8.5킬로미터를 한 번도 걷지 않고 뛰었다. 와중에 러너스 하이도 경험했다. 보통 러너스 하이라면 마라토너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30킬로미터 후반대 지점에서, 극한의 고통을 견디기 위해 나오는 체내 각성 물질에 의한 희열을 말한다. 나는 이삼 킬로미터 지점에서 러너스 하이 비슷한 희열을 느꼈다. 당장 걷고 싶을 만큼 힘든 초반의 순간을 넘기니 몸이 달리기 모드로 바뀌어 호흡이 편안해진 것이다. 물론 훈련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8.5킬로미터가 한계였지만 말이다. 매일 같이 꾸준히 달렸다고는 할 수 없어도, 일주일에 두세 번은 호수공원의 러닝 트랙을 돌았다. 띄엄띄엄 달리다 보니 실력이 늘지 않았고, 어느 날엔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심했다. 대회 분위기도 잘 모르겠고 혼자 뛰는 것도 어색했지만, 다행히도 나에게는 일성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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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통통한 몸으로 살아온 일성이에게도 운동 욕구는 있었다. 늘 혹사당하는 관절을 생각해 주로 자전거를 타는 일성이였지만, 금강대교 밑에서 스스로 낚인 황어처럼 별다른 미끼를 쓰지 않은 나의 챔질에 일성이는 파닥파닥 함께 뛰기로 했다.
“마라톤 대회에 참가할 생각이야.”
“풀코스?”
“내가 어떻게 풀코스를 뛰냐? 당연히 십 킬로 단축마라톤이지.”
“하지 마! 형 그러다 죽어. 십 킬로면 마포에서 강남까지야. 그 거리를 뛰어간다고?”
“한 번도 걷지 않고 팔점오 킬로를 뛴 몸이다. 너 건각이란 말 들어봤냐?”
“반도 못 뛰고 구급차 실려 가는 모습이 벌써 보이는데?”
“같이 뛸래? 아니다. 네가 참가하기에는 너무 거칠고 위험한 대회다.”
“뭔 소리야? 자전거로 단련된 돌벅지가 있는데, 형도 하는데 나한테는 껌이지.”
“삼겹살 내기?”
“콜!”
일성이가 유부남이 된 후로 만남의 횟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노총각과 유부남의 저녁 약속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일성이는 아내 눈치를 봐야 했고, 나는 제수씨에게 미안해 술 약속 잡는 것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건 명분이었다. 단순 술 약속이 아니라 건강을 위한 마라톤 대회 참가라면 일성이 입장에서 허락받기는 한결 수월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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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참가하기로 한 대회는 뉴발란스에서 주최한 <뉴레이스 서울>이었다.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출발해 통제가 진행된 주변 도로를 달려 돌아오는 코스로, 참가자가 2만 명이나 되는 규모가 제법 큰 대회였다. 경기장 주변에는 공식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뤄 온통 연두색 물결이었다. 모두 같은 옷을 입고 있어 약속 장소를 정했음에도 일성이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필 때 일성이가 환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일성이 뒤에는 자의 반 타의 반 주말을 반납하고 사장에게 끌려 나온 이삼십대의 직원 몇 명이 있었다.
“자 여러분! 여기 계신 김별로 작가님은 자타가 공인하는 마라톤 전문가이십니다. 우리 중에 마라톤 경험자가 없으니 김별로 작가님의 지도에 잘 따라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안전하게 모두 완주합시다. 큭큭.”
훅 들어온 일성이의 추앙에 비아냥이 섞였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생길지도 모를 사고에 노파심이 생겨 당부의 말을 건넸다.
“단축 마라톤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사망사고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대회도 풀코스가 아니라 십 킬로나 하프거든요. 저는 어느 정도 훈련이 된 상태지만 여러분들은 이 정도 거리를 처음 달려보시는 거니까 절대 무리하지 마시구요. 완주에 자신 없는 분들은 제 뒤를 따라 달리시면 됩니다. 출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가볍게 몸을 풉시다. 따라 하세요!”
나는 마라톤 마니아 지인에게 배운 대로 다리를 꼰 후 무릎을 굽히지 않고 땅바닥을 향해 팔을 쭉 뻗었다. 비록 손바닥은 무릎 언저리까지밖에 내려가지 않았지만, 다행히 직원들은 각자 몸을 푸느라 내 뻣뻣한 몸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사전 행사의 사회자는 노홍철이었다.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멘트가 대회장의 커다란 음악소리를 뚫고 나와 분위기를 한층 달궈주었다.
“우하하하! 좋아! 좋아. 오늘 날씨 예술! 여기 계신 분들 멋져! 이뻐! 이뻐! 너무 이뻐어! 자, 모두 완주할 자신 있는 거죠? 완주할 자신 있으면 다 같이 소리 질러! 좋아. 에이 그룹부터 질서 있게 출발합니다. 모두 출발선으로 이동! 핫 둘 핫 둘! 이제 곧 카운트다운 들어갑니다. 좋아. 가는 거야! 아이 세이 가는, 유 세이 거야. 가는! 거야! 가는! 거야! 진짜로 출발합니다. 뿅! 자 그럼 모두 다 같이 텐, 나인, 에잇, 세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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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일성이는 C그룹, 일성이네 회사 직원들은 D그룹이었다. 우리는 수많은 인파의 흐름에 발맞춰 출발했다. 그리고 일성이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시뻘게진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며 뛰던 일성이의 속도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일성아! 괜찮냐?”
“응. 헉헉! 아직, 헉...괜찮아!”
“너 지금 얼굴 터질 것 같은데, 조금만 참으면 몸이 곧 적응하고 호흡이 괜찮아질 거야.”
“그 단계는 헉! 아까 지났어. 헉헉!”
도로변의 안내 표지판에는 큼지막하게 ‘4KM’라고 적혀 있었다. 일성이랑 계속 함께 달리다가는 한 시간을 목표로 한 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것 같았다.
“형 먼저 가! 나는 금방 따라갈게.”
“내가 너를 두고 어떻게 혼자 가?”
오 킬로 지점에서 일성이를 버렸다. 일성이는 자유낙하를 하다가 낙하산을 먼저 편 사람처럼 순식간에 내 뒤에서 사라져 버렸다. 마라톤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나는 일성이가 포기하지 않고 완주하기를 바라는 한편, 도로 통제가 풀려 일요일 오전에 교회를 가는 어느 단란한 가족 사이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걷듯이 뛰는 모습을 즐겁게 상상했다. 와중에 마라톤 무경험자들로 구성된 D그룹의 일성이네 회사 직원들은 단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마라톤이 장난이야?’ 훈련된 나와 ‘마라톤이 뭔가요?’ 일반인들과의 차이가 느껴져 기분 좋은 우월감이 들었다. 나는 일성이와 보조를 맞추느라 까먹은 기록을 회복하기 위해 피니시 라인을 향해 피치를 올렸다. 1시간 12분. 애초 목표했던 기록에는 못 미쳤지만 부상 없이 완주를 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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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의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근처 식당 대부분은 문이 닫혀 있었다. 이른 점심을 먹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식당을 찾아 헤매다 문 연 곳에 들어가면 어김없이 연두색 티셔츠를 입은 참가자들로 만석. 우리는 삼십 분 넘게 걸어가서 간신히 식당 한 곳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김팀장님은 기록이 어떻게 돼요?”
“저는 허리가 안 좋아서요. 간신히 완주했네요. 1시간 2분이요!”
“전팀장님은요?”
“저는 50분입니다. 중간에 여자 친구에게 전화만 안 왔어도 더 빨리 들어올 수 있었는데 아까워요. 김작가님은요?”
심지어 날씬하지 않은 몸매의 유일한 여직원도 1시간 11분 30초였다. 나보다 늦게 들어온 건 일성이 밖에 없었다. 도저히 제한시간 안에 들어오기 힘들어 보였던 일성이의 기록은 1시간 27분, 나와는 15분이나 뒤쳐진 기록이었지만 어쩐지 내가 진 기분이었다.
“아이고, 김별로 작가님! 우리 직원들 챙기시느라 제대로 못 달리셨나 보네요. 페북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마라톤이 어쩌구 잘도 올리시더니, 기록이 참 겸손하세요. 푸하하!”
일성이는 꼴찌를 한 주제에 뭐가 그리 신나는지 볼이 터지도록 밥 한 숟갈을 입에 넣고, 생애 첫 마라톤 대회의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함께 달린 직원들은 처음 알게 된 이야기라도 듣는 듯 식사도 멈춘 채 일성이에게 주목하고 있었다. 나는 일성이 옆에 앉아서 유리컵에 가득 담긴 맥주를 한입에 털어 넣었다. 맥주 맛은 참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