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에서 만난 사람들

재미에서 신념으로

by 우리동네지영씨

하늘색 손잡이, 투명 비닐우산이 질질 끌려간다. 자기 키보다 훨씬 클 것 같은 우산을 전리품처럼 끌고 간다. 끌려가는 우산 모양이 괜히 우습다.

아빠는 좁은 오솔길을 아이와 걸음을 맞춰 걷는다.

청바지 아랫단을 접어 올리고 한 손은 머리 위로 뻗어 아빠 손을 꼭 잡고 걷는다.

뒤에 따라오는 우리를 발견하고 아빠는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사람 피할 방도가 없는 오솔길에서 우리도 재촉하지 않고 천천히 따라 걷는다.

아이 손에 과자를 쥐어 준다. 그러나 오래 버티지 못한다.

우리가 대화하는 사이 아이는 캠핑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있다. 손에 흙을 쥐고 아빠에게 바른다. 마른 흙이 아빠 옷에 얼룩을 만든다. 아이 엉덩이도 어느새 하얗다.

아빠는 개의치 않는다. 잔소리도 하지 않고, 굳이 먼지를 털어내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시 아이를 캠핑 의자에 앉히지 않고 바닥에 그대로 둔다. 아빠의 여유로움이 뜻밖이다. 아이와 아빠를 번갈아 본다. 수수하고 편한 옷차림이 때로는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아빠는 아이가 시골아이 같아 좋다고 한다.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자연스럽게 크길 바란다는 진주씨.


우리는 강에서 만나 회의를 했다. 진주씨는 뭐라도 들고 와야 할 것 같아서 가져왔다며 작성해온 서류를 꺼내 보인다. 아이는 손을 잡고 아빠를 기어코 일으킨다.

가을 오후, 강가에 쪼그려 앉아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부녀가 다정하다.

공짜란다. 공짜는 못 참지.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선착순 100명에 못 들까 봐 보자마자 신청한다.

선착순보다 서두르게 하는 말은 없는 듯하다.


다큐멘터리 영화 ‘추적’

영화에서 내가 인상 깊었던 장면은 독일의 강에서 노는 사람들 모습이었다.

강에서 수영하고,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고, 책을 읽는다.

바로 물 옆에서.


우리는 강을 정비하고 잘 닦아놓은 길을 산책하고, 달리고, 자전거를 탄다.

편의점에서 라면을 먹고, 잔디밭에 텐트를 치고 치맥을 즐긴다.

우리도 강을 즐긴다.

하지만 강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저 바라보며 풍경을 즐긴다.

강에서 놀아봤었던가? 어릴 때도 강은 보기만 했던 거 아닌가?


뜨거운 여름 한낮

아버지는 나와 동생을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흑석리에 갔다.

도착하면 동생은 뜰채를 들고 습관처럼 아버지 뒤를 따라다녔다.

둘이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돗자리에 앉아 혼자 음악을 들었다.


자동차가 생긴 뒤로는 온 가족이 함께 다녔다.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준 스피커가 하나 달린 작은 카세트를 꼭 챙겼다.

아버지와 동생은 물고기를 잡고, 엄마는 다슬기를 잡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물속에 들어가 놀고 싶지 않았다.

돗자리에 앉아 먼 산을 바라보며 음악을 듣거나 책을 봤다.

강에서 책을 보면 꼭 졸리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엄마는 식사 준비에 분주하다.


함께 갔던 정권 아저씨는 예쁜 언니랑 둘이 산책을 했다.

나도 조금 따라가다가 이내 돌아온다.

아저씨랑 노는 것은 재미없다.

예쁜 언니는 뭐가 재밌다고 아저씨와 산책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해가 질 것 같은데 돌아오질 않는다.

두어 번 같이 다니던 아저씨는 이쁜 언니랑 결혼했다.

강에서 누군가 마음을 훔친다.


내가 처음 이름을 알게 된 물고기는 피라미다.

조그만 것이 귀엽고, 알록달록 색이 있어 이쁘다.

사람이 입술을 내밀고 있는 것처럼 주둥이가 두툼한 모래무지는 좀 투박했다.

쏘면 아프다고 만지지 말라고 했던 쏘가리도 항상 그물망에 들어있었다.

아버지와 동생은 뭐가 재밌는지 늘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다.

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아버지 뒤를 따라 다니는 동생은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나도 호기심에 몇 번 따라 나섰지만, 재미는 없었다.

동생은 나보다 물고기 이름을 훨씬 많이 알게 됐다.


엄마는 아버지가 잡아 온 물고기를 라면에 넣어 끓여줬다.

라면만 먹고 싶은데, 강에 가면 물고기를 먹어야 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다.

나는 별로인데 엄마는 맛있다고 호들갑이다.

자꾸 더 덜어준다.

에휴, 이게 무슨 맛이지?

이렇게 뜨거운 한낮 여름 하루가 간다.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또 있다.

세종보에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도 거의 600일 가까이 24시간 머문다는 것.

사람이 있으면 또, 가봐야 한다.

호기심 발동~

녹색 천막은 어디 멀리 있는 줄 알았는데 아파트 단지 바로 아래에 있다.


추석.

우리는 강에서 모이기로 했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이지 않은 건 오래됐다. 종가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명절 음식을 해왔던 나는 요즘 명절이 좀 허전하다. 드나드는 사람이 없으니 음식을 할 일이 없다. 기름 냄새가 없는 집안도 좀 썰렁하다.

이번 추석은 갑자기 분주하다. 달걀을 깨고, 쪽파를 썰고, 꼬지를 키우고, 동그랑땡을 준비하고, 포 뜬 생선에 소금을 뿌렸다.

전은 따뜻할 때 먹어야 제맛이라 시간 맞춰 전을 부친다.


강에서 만나 각자 가져온 음식을 꺼낸다.

송편에 동그랑땡, 꼬지, 동태전, 잡채, 각종 과일, 홍삼까지~

잔치다. 명절 맛이 난다.

헤어질 때 우리는 또 강에서 놀기로 했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다섯 명이 모였다. 단단히 싸매고, 소개할 책을 꺼낸다.

먹을 것을 꺼낸다.

김밥, 과일, 빵, 커피.

역시 풍성하다.

같은 책을 읽고 소감을 나누는 독서 모임도 재밌지만, 각자 자기가 읽은 책을 소개하는 독서 모임도 흥미롭다.

내가 소개하는 이 책이 재밌으니~많이 읽어보세요~

소위 말해 책을 판다.

소개만 듣고 재밌을 법한 책은 그 자리에서 빌린다.

이렇게 강에서 또 누군가의 마음을 훔친다.


우리 동네 강은 시끌시끌하다.

정치인이 온다며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오고, 기자들이 삼각대를 세운다.

한쪽에서 이렇게 북적이고, 다른 쪽에서는 또 다른 이유로 북적인다.


가을, 주말 우리는 아이들과 놀 시간을 준비한다는 웹자보를 봤다.

나도 돕고 싶어요~

이른 아침 다리 밑 그늘은 코끝이 빨개지고 손이 시리다. 핫팩으로 데워가며 현수막을 설치하고, 체험 테이블을 펼친다. 한쪽에서는 중앙 무대를 준비하고 음향을 점검한다.


덩치 큰 청년 셋이 온다. 커다란 카메라를 매고, 뜰채를 들고 있다.

‘여기서 뜰채로 물고기를 잡는다고? 강에 들어가서?’

강에서 놀아본 게 너무 오래되어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강에 가면 언제나 물고기를 잡았으면서 청년들의 모습은 낯설었다.


잠시 뒤 채집통 가득 물고기를 잡아 왔다.

우리 아버지는 훨씬 더 많은 물고기를 잡았었지만, 채집통 속 물고기가 많아 보인다. 한참 들여 다 봤다.

오랜만이다 민물고기.


둥글고 납작한 돌이 쌓인다. 돌에 그림을 그릴 예정이다. 정래씨가 강가에서 주워다 닦고 말려놨단다.

새를 좋아하는 재민씨는 돌 위에 밑그림으로 새를 그려 둔다.


도훈씨는 물수제비 전문가다. 작고 동그란 돌을 손가락에 쥐는 법을 알려준다. 던질 때 요령도 설명해준다. 모두 고개를 숙인다. 돌을 찾느라 여념이 없다가도 도훈씨가 돌을 던지면 쳐다본다.

일곱, 여덟~와~ 숫자를 세던 아이들이 환호한다. 멋지다. 따라 해보지만 금세 고개를 숙여야 한다. 아이들이 이렇게 던지다가 여기 돌이 다 없어지면 어쩌냐고 걱정한다. 돌은 바닥에 널렸어~

한쪽에선 여자아이 둘이 쪼그리고 앉아 돌탑을 쌓는다. 납작한 돌을 찾아 여기저기 왔다갔다 바쁘다. 쌓다 무너진다. 무슨 특별한 방법을 터득한 것처럼 다른 돌을 주워온다. 또 무너진다.


피리 부는 사나이처럼 도훈씨 뒤에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줄지어 따라간다.

도훈씨는 야생동물 발자국과 배설물을 설명해준다.

또 고개를 숙인다. 고라니 발자국, 고라니 똥, 수달 발자국.

돌 위 백로 배설물을 보고 아이들이 말이 많아진다. 하얀 물감을 칠해둔 듯하다.

흥미로운 건 수달의 배설물이다. ‘이 구역의 대장은 나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잘 보이는 곳에 당당하게 흘려놨다.


오늘 행사는 내빈도 없었고, 시민들이 만들고 시민들이 참여하는 형식이었다.

마지막 정리까지 하고 남은 소감은 한마디로


자유롭다.


강에서 보내는 시간은 자유롭다.

들어 가면 안 돼!

옷 더럽히면 안 돼!

빠지지 않게 조심해!

위험해!

금지 사항이 없다. 한계가 없으며 제한이 없다.


강변에서 자전거를 탈 때도, 달릴 때도 우리는 늘 잘 닦은 길을 따라간다.

징검다리를 건널 땐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중심을 잡는다.

누가 안 된다고 하지 않아도 우리는 경계를 넘지 않는다.


산 입구에는 문턱이 없다.

바다에도 울타리가 없다.

공원에도 경계가 없다.

우리가 자연으로 들어가고

자연이 우리 안에 머물 때

사람과 자연 사이엔 선이 없다.


경계는 강에만 존재한다.

강과 사람을 구분해 놓고

강을 그저 ‘구경하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강도,

다른 자연처럼

누구나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돌려놓아야 한다.


사람은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

영화를 좋아하니 가본다는 단순한 생각이,

사람이 있다면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지 들어봐야겠다는 호기심으로 바뀌고,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오늘도 거리에서 사람에게 배운다.

사람은 사람의 가장 큰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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