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는 아니다
면목이 없다. 발걸음이 무겁다.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건데도 참 작아진다.
그래도 가야 한다. 오늘은 아침 집회 마지막 날이다.
마주치면 처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느 날 집회 중에 경희씨가 김밥 싸주실 만한 분 소개를 부탁했다.
김밥? 김밥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음식이다.
당연히 내가 한다고 말했다.
얼마나 필요해요?
50줄요.
50줄 싸본 적은 없지만 그리 겁날 양도 아니었다.
김밥은 걱정하지 말아요.
집에서는 현미에 잡곡을 섞어 김밥을 말기 때문에 맛은 있지만, 색이 이쁘지 않았다.
남편이 햅쌀을 가져왔다. 흰쌀. 김밥이 이쁘게 될 것 같다.
햅쌀밥을 지어본 지 오래라 일단 밥 짓기를 연습했다.
물양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 물을 좀 적게 하니 세 번 만에 만족할 만한 밥을 지었다.
묵은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아이가 갑자기 김치를 찾는다.
김밥 쌀 분량을 계산하고 조금씩 내주었다.
이제 재료는 완벽했다.
다음은 시간 계산. 미리 싸두면 편해도 맛이 없다.
재료도 냉장고에 들어갔다 나오면 맛이 안 난다.
새벽 4시부터 준비하면 11시까지 맞출 수 있다.
경희씨는 호일에 싸서 주면 된다고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김밥을 한 줄씩 담는 종이상자를 주문했다. 하루 전날 배송 확률 98%.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실력 발휘다.
다른 음식은 다 사 먹어도 정말 시중 음식에 양보할 수 없는 것이 김장김치와 김밥이다.
그중 하나를 하게 되니 설레기도 하고, 이날을 위해 그렇게 많은 김밥을 말아왔나 싶기도 했다.
오이를 사러 가야 한다. 근처는 아니어도 아침 일찍 문 여는 마트를 검색했다. 사와도 시간은 충분하다.
갑자기 자동차 시동이 안 걸린다. 여러 번 시도해도 안 된다. 긴급출동을 불렀다. 배터리를 갈아야 한단다.
예상치 못한 지출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김밥의 책임이 더 무겁다.
머릿속으로 또 시간을 계산한다.
아직 괜찮다.
어제 왔어야 할 포장 용기가 안 왔다.
재료 준비를 하면서 호일을 사와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녁 늦게 온다는 택배 문자가 왔다. 직접 받으러 간다고 약속을 하고 나니 한숨이 나왔다.
걱정되었는지 윤이 아침에 눈 뜨자마자 왔다.
윤이 잔일을 도맡아 해주니 준비가 수월하고 속도가 붙었다.
밥을 지어 말기만 하면 된다.
집에서 쓰는 압력솥 두 개를 꺼냈다. 밥 짓기 연습을 미리 해뒀고, 예상보다 시간도 여유 있었다.
재료를 한곳에 모아두고 김밥 말 자리를 마련하고 밥솥을 열었다. 밥이 약간 되다.
어차피 또 밥을 지어야 하니까 일단 말아본다. 김밥이 뻑뻑하다.
아 참! 절여둔 오이를 빼먹었다. 그동안 오이가 있어서 촉촉하게 먹었나 보다. 오이를 추가한다.
윤이 썰다가 자꾸 터진단다.
밥이 뜨거운가. 밥을 식히고 다시 도전.
말아둔 김밥이 풀린다. 된 밥이 문제인가.
다시 부랴부랴 밥을 짓는다. 이번엔 물을 조금 더 넣어본다.
이렇게 밥을 다섯 번 지었다.
풀어진 김밥이 늘었다. 옆구리도 터진다.
11시다.
미안해요. 김밥은 안 되겠어요. 김밥집에 시켜야 할 것 같아요.
힘이 빠졌다. 당분간은 김밥을 먹지 않을 것 같다.
행사장 안으로 한 발짝도 들어가지 못했다.
입구에서 살짝 보니 손님이 많이 왔다. 북적북적하다.
활동지원사 수현씨와 마주쳤다.
얼마나 맘고생 했어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사람들 대체 뭐야. 자기들 행사 망칠뻔했는데 왜 나를 위로하냐고.
경희씨가 나를 다독이고, 급히 김밥을 찾으러 갔다.
급히 가야 해요. 경희씨에게 월요일 아침에 집회 간다고 전해주세요.
저녁에 경희씨가 전화했다. 또 나를 위로한다.
아...이사람 어쩌라고...진짜...또 나를 울리네...
집회에 아무도 없다. 사무실에 올라가 봐도 아무도 없다.
시의회 앞에서 기다린다. 경희씨가 피켓을 목에 걸고 나타난다.
웃고 있다.
미안해요.
경희씨는 또 나를 위로한다.
내 마음 편하게 해주려고 집회 끝나고 아침 먹자는 제안까지 했다. 일부러 아침을 안 먹고 나왔단다.
따뜻한 위로들이 무거운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나는 무거운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기로 했다.
기회는 또 있다. 그때 털어내도 늦지 않다.
위로는 다음을 생각하게 한다.
내 머릿속엔 벌써 내년 경희씨 단체의 송년회를 어떻게 꾸며줄까 생각이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어떻게 해줄지도 생각한다.
넓은 세상을 배운다며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세상으로 나간다.
나는 함께 서 있는 사람에게서 넓은 세상을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