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가 전부
옷장을 열고 한번 훑어본다. 가장 따뜻할 만한 양말을 두 개 집었다.
태어나서 양말을 두 개 신은 적이 있던가.
양말을 겹쳐 신는 것이 영 어색하다.
그래도 어쩌랴.
추위는 발가락부터 오고 발이 시리면 못 버틴다는 걸 이제 알게 되었는데.
운동화는 못 버틴다. 털신이 필요하다.
동네 친구들부터 수소문해본다. 먼 곳은 가지러 갈 시간이 없다.
모카신이 하나 올라온다. 발등은 좀 시릴지 몰라도 발가락은 따스울 테니 운동화보다 낫다.
크기도 적당하다.
장갑 한 짝이 없다. 장갑도 필수인데 어제 현장에 두고 온 것인지 왜 한 짝만 돌아다니는지 알 수 없다.
차에도 없고, 주머니에도 없다. 집안을 뒤질 시간도 없다.
행사 시작 전에 도착하려면 지금 나가야 한다.
모카신을 주기로 한 이은이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다.
집 앞에서 보는 건데 어딜 다녀왔는지 차에서 내린다.
선물을 준비했다며 상자를 하나 건넨다.
털부츠.
코스트고에 장 보러 갔다가 사 왔단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감동을 표현하기 위한 시간도 없다.
대충 인사하고 돌아서면서, 누구에게 이렇게 선뜻 호의를 베푼 적이 있었나 자신을 돌아봤다.
핸드폰 베터리가 65프로.
오늘 현장은 보도자료가 없다. 주변을 둘러본다. 서류 판을 들고 다니며 서로 상의하는 모습이 보인다.
혹시 오늘 행사 진행표 있나요?
발언하는 사람 이름이 필요하다. 프로그램 끝에 가족 편지 낭송이 있다. 보도자료가 없으니 이건 꼭 현장에서 녹음을 해야 한다.
남은 베터리 57프로.
행사가 지연된다. 하고 싶은 말도 많고, 해주고 싶은 말도 많은 것 같다.
밥차가 왔다.
밥이...음...학생식당도 이렇진 않다...
일터를 지키겠다며 추위에 바닥에 앉아 밥을 먹는다.
이들의 일상이 무너졌다.
베터리 43프로.
2부 응원하는 공연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멘트도 있고, 앵콜까지 한다.
노동자들이 나와서 개사한 노래를 부른다.
발이 시리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운동화다.
사진을 찍으려면 장갑을 벗어야 한다. 잠금 해제 수단이 지문이다.
장갑을 끼고 있는 게 사치다. 핫팩을 하나 들어본다. 사방을 둘러봐도 뜯어진 곳이 없다.
핫팩을 내려놓는다.
아직 가족 편지 낭송은 멀었다.
베터리 28프로.
출발 전에 기자는, 춥거나 힘들면 그냥 오라고 했다.
오늘 행사에서 정말 놓치지 말아야 하는 장면은 갖고 가야 한다.
가족 편지 낭송이 끝났다.
베터리 3%.
해고 노동자 기자회견 기사는 결국 나갔다.
협상은 결렬됐고, 해고 이틀 전 결의대회는 발이 시리면 현장에서 못 버틴다는 것을 알게 했다.
노동부에서 근로감독 결정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내일 해고 된다.
이은이 준비해준 털부츠는 천군만마와 같다.
현장은 어제보다 더 춥다.
달라진 건 없다.
해고된다는 사실은 변함없고, 밥은 여전히 부실하고, 고용승계 희망은 없다.
기자도 없다. 내가 기록하지 않으면 이건 노동자들만의 문제가 된다.
취재를 마치고 곧바로 집으로 출발하지 못했다.
쉽게 현장을 떠나지 못하고 차 안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몸을 녹여야 했고,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기사를 정리하지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