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진 장면
남자가 활짝 웃으며 귤을 건넨다.
여자가 싫다고 고개를 흔든다.
저 남자가, 그 남자 맞나 싶다.
비 오던 기자회견 날,
두 발을 벌리고 바닥에 붙어서서
한치도 흔들림 없이 비를 맞고 서 있던 남자가 웃는다.
방금 해고 직전의 남편, 투쟁이 한 달을 넘어가면서 집에 잘 들어가지 못하는 남편을 둔 아내의 마음, 가정의 모습을 전해야 할 것 같아 몇 가지 물었던 여자다.
비 맞던 늠름한 남편 모습을 슬쩍 전해줬다.
머리에 ‘투쟁’ 글씨가 적힌 띠를 두른 아기가 엄마 품에 안겨있다.
젊은 아빠는 어깨에 기저귀 가방을 메고 옆에 서 있다.
11개월 아기.
연대자들과 친해지라고 게임 하는 동안 아빠는 연신 싱글벙글이다.
아내가 지지해주고 응원해줘서 힘든 것이 없다는 초보 아빠.
싸움이 얼마나 길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아직 현실을 마주하지 못한 것 같은 모습에 계속 눈이 간다.
날씨는 점점 추워진다. 오늘은 나도 핫팩을 뜯어 장갑 속에 넣었다.
결의대회 무대 뒤로 해가 넘어간다.
퇴근해야 할 시간에 회사를 지키고 있다.
내일이면 해고자가 된다. 사회적 신분이 바뀐다.
닥치지 않은 예정된 미래는 두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 연대한다.
벌써 네 번째 현장에 왔다. 사람들이 차츰 나를 알아본다.
현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일정표를 찾는다.
순서를 보며 대략 흐름을 파악하고, 발언자의 이름을 확인한다.
집을 나서기 전, 담아야 할 장면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전에 인터뷰했던 노동자들이 오늘도 현장에 있는지다.
재빠르게 현장을 스캔하고 위치를 파악해 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한 게 있는지 담아야 한다.
새해 첫 평일.
신규 노동자들이 현장에 투입될 수 있고, 해고노동자들은 회사를 지키고 있다.
연대 발언의 주제는 같다. 이탈하지 않으면 승리한다.
해고 이후 가장 중요한 것은 이탈을 막는 일이다. 발언자만 바뀌고 주제는 변함없다.
아침 8시가 되자 현장을 감싸고 있던 긴장이 풀린다.
출근 시간에,
출근자가 없다.
집에 와서 부츠를 벗는다. 한 번 더 쳐다본다.
이은이 준 부츠는 보기만 해도 따뜻하다.
얼른 기사를 써야 한다.
노동자들이 기다린다.
늦으면 현장의 느낌도 희석된다.
오늘 기사는 타이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