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카페 영업 일지
#장면 1
짤랑. 문이 열리고 들어오자마자 빵 봉투를 내미는 수수님.
"점심 안 드셨죠? 이거 방금 가져온 우리밀 빵인데 드셔보셔요."
나 혼자 먹기엔 양이 많다고 하자 주변의 손님들을 둘러보고 그가 하는 말.
"나눠 드세요 호호"
옆에 앉아 계셨던 손님이 저요저요! 손을 든다.
감사한 마음에 할아버지 손님에게 나눔받은 뱀사골 사과와 배를 건네자 씨익 웃으며 기뻐하는 수수님.
#장면 2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손님 세분이 들어와 4인석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돌아가며 책장을 한참 둘러본다. 책을 좋아하시는구나- 싶었는데 3분이서 책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친구이자 동업자인 2R과 눈으로 웃었다. 우리도 20대때 그렇게 책을 읽고 치열하게 이야기를 나눴기 때문이었다. 그날 영업을 모두 마치고 둘이서 회식 겸 저녁을 먹을때 2R은 "오늘이 정말 고무적인 날"이라고 말했다. 한쪽 자리에서는 젊은 여자 손님 3분이 비거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반대편 자리에서는 젊은 남자 손님 3분이서 책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한다. 그리고 가운데에는 어르신 손님이 계신다. 서로 같은 공간에서 다른 내용을 채우고 있지만 묘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공간에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감각.
#장면 3
가게 영업을 마친 젊은 소상공인 친구가 우리 가게로 놀러온다. 서로 깔깔 웃기도 하고, 인상을 찌푸리며 불안을 공유하기도 한다. 차를 마시며 잠시 같이 숨을 돌리면서. 그러다 이내 그래 올해도 일단 건강하자!고 외치며 같이 칼바람을 맞으며 운동장을 몇바퀴 걷고 헤어진다.
#장면 4
간혹 책 2~3권씩 사가는 손님과 동업자인 2R이 짧게 이야기를 나눈다. 알고보니 정진하는 공부가 같았던 것. 내가 보기에 둘은 뭔가를 동시에 이해한 사람처럼 보였다.
#장면 5
동업자인 2R과 매일 뭘 만들어본다. 자책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해 이야기나눈다. 이러저러한 농담을 하며 웃고, 서로에게 바라는 점에 대해 솔직하게 말해본다. 그렇지만 솔직함을 핑계로 화를 냈다면 그건 다시 사과한다. 사과가 잦아져서 민망해질지라도. 미안한 일에 대해서는 미안하다고 한다.
은유적으로도 완전히 깜깜한 겨울이었던 12월을 지나 새해의 1월이 되었고, 가게를 찾는 사람이 늘었고, 2R이 의욕적으로 나를 잡아 끌며 일을 하기 시작했다. 1월은 매일을 꽤나 성실하게 보낸 것 같았다.(일단 몸이 너무 힘들고 손목이 저리고 어깨가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날은 아- 일을 많이 했구나 싶다)
며칠 전 온수매트를 틀어놔 포근하고 따뜻해진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반려인은 이미 작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원래 눈 감으면 바로 잠드는 성격인데 그날은 이러저러한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뭔가를 조금씩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작은 희망에 가까웠다. 대단하진 않지만 좋은 것들을 사람들과 나누고, 모두 자신이 원하는 이로운 시간을 보내는 곳.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고, 정말 아주 미세하게 만들어가고 있지 않나. 어쩌면 내가 이루고 싶었던 것은 이런 것일까. 그러니까 좋은 이웃을 얻는 일이었을까.
회사원시절, 팀장과 대표에게 내가 하는 일을 인정받기 위해 이 일이 얼마나 많은 매출을 불러올지, 시장에 기회가 있는지 보여주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 나도 취해있었던 것 같다. 성장의 분위기, 성장할 기회에 대한 분위기, 시장에 대한 기대, 가능성의 대축제. (내가 일하던 곳이 스타트업이라서 더 그런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사실 그리 배포가 큰 사람이 아니다. 규모가 큰 일에 크게 관심도 없다. 내가 수습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일을 힘빼고 하는게 훨씬 즐거운 사람인 것 같다. 물론 개인적 성장에는 큰 관심이 있지만 GDP나 회사 사내 보유금 증대로 대변되는 어떤 '규모의 성장'에는 점점 반대하게 된다. 그것이 사람에게 진실로 유익한가? 어쨌거나 나는 그 일은 그만두었다.
한국 사회는 점점 원자화되고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곳이 되는 것 같다. 그와 반대로 자발적으로 가난한 길을 택하는 스스로가 의아스럽고 불안해질때가 이런 나에게도 있다.(나는 불안한 정도가 낮은 사람인 것 같았는데) 계속 커리어를 쌓아나갔다면 받게될 연봉에 대해서. 서울에서 살아가며 꾸준히 스스로를 키워나갈 기회들에 대해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하는 벼랑 끝 낭떠러지 사회에서 살아나갈 고단함에 대해 나도 아주 가끔씩 떠올린다. FOMO, Fear Of Missing Out. 뭔가를 놓쳐버릴 것 같은 두려움은 가끔 문앞에서 나를 기다린다.
하지만 희한하게 그런 두려움이 나를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한다. 그랬다면 나는 진작에 이 시골살이를 접고 다시 떠났을 거다. 정착하지 않았을 거다. 가게를 열지도 못했을 거다. 왜일까... 이불 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아무래도 내게 좋은 생활과 공간, 좋은 이웃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동업자와 늘 하는 말마따나 "우리 공간도 좋고, 시골살이도 정말 좋다니까. 우리가 돈을 못 버는 것만 빼면 다 좋아."
그래, 하지만 이제는 생계를 위해 돈도 조금 벌도록 하자 ^^
다음 편에 계속하기로 하자 ^^
(시골집에서 글쓰는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