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전성시대
드라마가 정말 드라마였던 시절이 있습니다.
2004년에 몇 살이셨나요?
저는 막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절이었습니다.감수성 예민한 그 소녀시절, 즐겨본 드라마들이 꽤 있었어요. 지금도 기억하는 대사들, 장면들, 그리고 주옥같은 OST까지...잊을 수 없는 소중한 작품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2004년은 정말이지 한국 드라마의 르네상스 시절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최고의 드라마들이 모두 2004년에 이 세상에 나왔더라고요.
개인적으로, 그중 최고를 꼽자면 <파리의 연인>, <발리에서 생긴 일>, <풀 하우스>, <미안하다 사랑한다>
를 꼽습니다.
모두 평균시청율 40%를 웃도는 저력을 발휘했고, 그중 <파리의 연인>은 최고시청률 56.3% 였다니...
전 국민의 반 이상이 TV앞에서 박신양과 김정은을 기다리는 날이 있었다는 이야기예요.
요즘 OTT에서도 심심찮게 옛 드라마들을 다시 보게 해 주는데, 그중 <발리에서 생긴 일>이 눈에 띄어 정주행을 했어요. 리모컨을 타고 2025년 30대 중반의 제가, 순식간에 2004년으로 돌아갑니다.
놀랍게도 대사도 , 표정도 모두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 또한 똑똑히 기억이 나요.
21년 전 작품 속 배우들은 하나같이 수수하며 풋풋했고, 슬프도록 멋집니다. 물론 지금도 너무 멋진 배우들이지만 젊음이 주는 특별한 아우라와 에너지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 시절 드라마의 내용들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고, 극적요소도 넘쳐납니다.
돌직구 같은 직관적인 대사들과, 시적인 대사, 시공간을 넘나드는 연출, 등등..지금 시대에 보면 허술하고 조금은 서툴러 보이는 구성들도 오히려 드라마틱하게 느껴져요.
소녀라면 모두 한 번쯤은 꿈꿔볼 만한 신데렐라스토리, 남자들이라면 한 번쯤은 꿈꿔보는 젠틀맨의 삶,심장미어질 듯 복잡한 남녀의 러브스토리, 닿을 듯 닿지 않는 인연 등등...
현실에서 마주하기 힘든 요소들로 범벅이 된 와중에, 모든 상황을 각인시켜버리는 OST까지.
그 시절 드라마는 어쩌면 우리가 현실에서 잃어버린 감정들을 '극단적으로'상상하게 해주는 예술이었던 같아요. 요즘 드라마는 현실이 조금 덜 슬퍼 보이게 만드는 '거울'효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저는 요즘 나오는 극사실주의, 극현실주의적 드라마는 집중이 잘 안 되더라고요.
출근하면 볼 수 있는 눈밑다크서클 가득한 여주인공은 아쉽게도 썩 와닿지 않습니다. 카톡에서 주고받을 법한 간결하고도 냉정한 어체에는 쉽사리 감정이입이 안되고요.
드라마가 현실을 100% 반영해서 좋은 점도 있겠지만, 드라마가 현실을 100% 반영한다면 현실의 저 건너편에 있는듯한 드라마틱한 '드라마'는 어디서 봐야 할까요.
볼 것이 넘쳐나는 세상, 이제 시청률이 20%만 넘어도 대박작품이라는 칭호를 얻습니다.
그 시절 그때의 드라마는 지금처럼 완성도 높고, 화려하고, 구성이 촘촘했던 것도 아니지만
'심장을 흔드는 일' 만큼은 아주 맛깔나게 잘했던 것 같아요. 단순히 TV앞에서 '몰입'을 하는 게 아니라 간접적 '경험'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즐거움도, 절절함도, 인간의 어떤 불완전함도 구구절절하게 표현했던 시대.
그 시절 저에게 드라마는 이상과 현실사이에 마지막 피난처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습니다. 예쁘고 좋은, 정제된 극적인물과 상황만을 원하는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지만 그럼 좀 어때요? 모두 신데렐라 한 번쯤은 꿈꾸잖아요. 유치한 우연 상상하잖아요. 백마 탄 왕자, 영원한 사랑, 고귀한 인연 ..이런 거 모두 가슴속에 하나씩 있지 않나요?
<그런 택도 없는 이야기는 소설에서나 있는 거고 나는 오늘도 야근이다.>라고 말하는 드라마는 저에게는
아직 좀 어렵습니다. 현실은 누구에게 퍽퍽한 닭가슴살 같잖아요. 나를 그런 현실로 데려다주는거 말고, 드라마만큼은 내 작은 판타지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검색해 보니 2004년 연기대상은 박신양 님과 김정은 님이 공동수상 했었네요. 제 다음 판타지는 <파리의 연인>이 될 것 같습니다. 다 알죠 그 대사?
애기야.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