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높은 나의 케렌시아

마음이 힘들 때 홀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었던 공간

by 하얀거북

스페인어에는 케렌시아라는 단어가 있다. 케렌시아는 투우장에서 소가 투우사와의 마지막 결투를 앞두고 잠시 쉬는 곳이다. 허락된 시간이 길지는 않겠지만, 케렌시아는 오로지 소를 위한 안식처다. 고등학생 시절, 학교는 입시라는 싸움을 강요하는 투우장처럼 느껴졌다. 성적과 입시라는 하나의 가치만이 작용하는 세상 속에서 나에게도 케렌시아가 있었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이.



인생은 특별한 시간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 우리의 삶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간은 평범한 하루하루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일상은 소중하다. 오늘을 의미 있게 보낸다면 어제도 내일도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내 일상이 싫었다. 이른 아침에 비몽사몽 학교 갈 준비하는 아침이 싫었다. 해가 천천히 하늘을 가로지르는 동안 교실에서 시험만을 위한 수업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저녁을 학원과 독서실에서 보내고 밤늦게 잠에 들면 다음 날 일찍 일어나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나와 친구들의 일상을 억압하는 교육을 부정했다. 책을 읽으며 세상을 공부했고 더 나은 세상을 꿈꿨다.


하지만 사회를 조금씩 이해하고 통찰은 깊이를 더해가도 일상은 변하지 않았다. 넓은 지구에서 나는 너무나도 작았고, 좁은 세상은 언제나 소음으로 가득했고, 시간은 나를 기다리지 않고 흘러만 갔다. 현실은 비루한 무언가가 되어갔다. 책이 열어주는 지식의 세상이 나를 구원하리라 믿었다. 이상을 품은 나는 배우는 삶을 살고 글을 쓰기로 했다. 몸은 학교와 학원, 집을 돌고 돌아도 머릿속은 구름 위를 걷고 있었다. 몸과 마음,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완화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 방법으로 나만을 위한 시간과 공간을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나는 케렌시아를 찾아 나섰다.


시간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마음은 이미 여행을 떠났기에 몸은 어디로든 갈 준비를 마친 상태였고 시간은 자연스레 따라왔다. 거리가 조용해진 새벽이나 한가한 주말의 오전 등. 문제는 공간이었다. 이토록 넓은 세상에 나 혼자만을 위한 공간은 없었다. 학교나 독서실에서는 혼자만의 시간에도 혼자일 수 없었다. 또한, 그 공간은 내가 벗어나고 싶은 세상이 작용하는 공간이었다. 집은 삶이 덕지덕지 묻은 공간이라 특별함을 만들기 어려웠다.


유력한 후보는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담긴 도서관이었다. 하지만 도서관은 사람들이 책을 읽는 공간만은 아니었다. 각종 자격증이나 어학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 순수한 배움의 즐거움을 얘기하는 것이 철없는 생각으로만 느껴졌다.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사람들의 무거운 침묵이 가끔 숨을 막히게 했다. 도심 어디에도 나만을 위한 공간은 없는 걸까. 그러다 번뜩이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니지만, 목적 없이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는 않았다. 나는 깨달았다. 나의 케렌시아는 가장 높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만만하게 찾은 우리 집 아파트 옥상 문은 잠겨 있었다.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운 아파트 옥상으로 갔다. 가장 높은 층에서 내려 한 계단을 오르고 문을 열었다. 해가 고개를 떨구기 시작하는 어스름한 황혼의 시간에 나는 가장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어 탁 트인 하늘을 바라보기도 하고, 아래를 보며 너무나도 작아진 동네를 관찰하기도 했다. 이곳에서 나는 자유로웠다. 옥상을 자주 찾게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수소문과 탐색 끝에 대로변의 주상복합 건물 옥상도 찾아냈다. 여기는 벤치가 있었고 온 동네가 멀리까지 훤하게 보였다. 이 두 옥상을 나는 자주 다녔다. 시간 여유가 될 때, 마음이 복잡할 때 케렌시아를 찾았다. 손가락 마디만큼 작아진 차들로 가득 찬 도로가 보였다. 수많은 사람이 살고 있을 집들이 보였다. 나는 가장 높은 곳에서 도로와 집들을, 사회를 관조했다. 저마다 너무나도 치열한 각자의 삶이 고작 하나의 점으로 보였다. 하나하나의 사람인 나무가 아닌 세상이라는 숲을 보다 보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눈앞의 고민이 이렇게까지 나를 괴롭게 할 무언가가 아니게 되었고 쓸데없이 무겁게 생각하던 일들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나는 케렌시아에서만큼은 쉴 새 없이 복잡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스라이 빛나는 점이 박힌 하늘을 보며 바람과 별과 시를 생각할 수 있었다. 생각을 정리하고 꿈을 꾸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마음이 무거울 때면 자유로운 사색을 즐기러 옥상으로 갔다.


옥상을 혼자서 찾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여러 친구와 케렌시아를 공유했다. 친구와 함께 어딘가를 간다고 하면 보통은 이 장소가 제공하는 활동에 목적이 있다. 밥을 먹거나 게임을 하거나 뭔가를 사거나. 나의 케렌시아는 장소만으로 목적을 제공하지는 않았다. 나의 케렌시아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자유로운 시공간을 제공했다. 여기서는 누군가와 생각을 나누며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었지만,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십년지기 친구들과는 어릴 적 다니던 골목길과 사라진 가게를 이야기하며 추억을 떠올렸다. 케렌시아는 과거를 되살렸다. 함께 삶의 생각을 나누던 친구와는 지루한 일상의 무게를 견뎌내는 인내를 토론했다. 케렌시아는 세상을 보여주었다. 인문학을 나누던 친구와는 배움이 없는 대학과 포기하고 싶지 않은 낭만을 고민했다. 케렌시아는 회포를 나누며 이야기를 나눌 공간을 기꺼이 자처했다.


우리는 각자 치열함을 안고 살아가는 투우를 한다. 수많은 투우사를 향해 돌진해야 하고 수많은 다른 소들과 경쟁하곤 한다. 전쟁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케렌시아가 필요하다. 나는 가장 높은 곳에서 나의 케렌시아를 찾았다. 세상을 한 발짝 뒤에서 볼 수 있는 케렌시아에서 나는 스스로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사는 게 힘들고 서글퍼지는 어느 날에 나를 기다리는 케렌시아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은 힘든 시기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옥상이라는 공간의 특성으로 인해 일어난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내가 찾던 아파트 옥상은 친한 친구가 살던 아파트였는데, 옥상을 올라가던 어느 날 친구의 아버지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다. 최근에는 뵌 적이 없었지만, 어렸을 적부터 몇 번 뵈어 얼굴이 익숙했다. 먼저 얼굴이 익숙하다고 아는 체를 해주셔서 나는 친구의 이름을 말하며 인사를 드렸다. 여기에 살지도 않고, 친구를 보러 온 것도 아닌데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을 때 나는 사실대로 생각이 많아서 옥상에 간다고 대답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더는 묻지 않고 내리셨다. 그날은 유독 바람이 차가워 옥상에 오래 있지 않고 내려왔다.


그리고 집에 도착해서 친구의 연락을 받았다. 친구의 아버지께서 내가 걱정되어서 가족들을 데리고 옥상에 다녀오셨다는 것이다. 다행히 내가 그 아파트 옥상을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친구가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우울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생각을 정리하러 옥상에 올라간다는 사람을 나라도 걱정했을 것 같다.


성인이 되고 난 후에는, 나의 케렌시아라고 부를 만한 공간이 없었다는 사실을 문득 생각하게 된다. 전과 달리 자취를 하며 혼자만의 공간이 생겨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는지도, 아직 그런 공간을 찾지 못한 걸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전보다는 고독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고민이 생기면 털어놓을 친구를 찾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혼자 생각하고 싶을 때면 산책과 함께 사색을 즐긴다. 마음이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케렌시아는 특정한 공간이 되기도 하지만 노래를 들으며 걸을 때는 어떤 곳도 될 수 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삶의 무게에서 벗어나, 오롯이 자신과 마주할 수 있는 당신의 케렌시아는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