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하나에 담을 것

삶을 윤택하게 하는 예술, 문학

by 하얀거북

우리가 경험하는 교육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간다. 시험에 매몰된 학습의 과정에서 질리게 되어버리는 수학, 과학, 역사의 학문적 지식. 중요하게 다루지 않음으로써 그 가치에 인색하게 되는 음악, 미술, 체육 활동과 같은 예술과 문화. 삶에서 필수적이지만 다루지 않기에 접할 수 없는 철학, 경제, 사회의 현안. 그리고 수업의 방식과 입시에의 맹목에서 비롯되어 체화할 수 없는 비판적 사고와 질문의 습관, 글쓰기와 말하기 경험의 부재. 하나같이 교육의 본질에서 어긋나 보이는 현실을 여전히 개탄한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잃어버린 가치 중 하나는 문학의 즐거움이다. 문제를 풀기 위한 문학만을 접하고 책을 가까이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교육을 받아온 마당에 문학을 온전히 향유하기란 쉽지 않다. 시와 소설을 대체하는 음악과 영화라는 미디어의 발전. 자연스레 책을 읽지 않는 사회. 그럼에도 나는 문학을 말하고 싶다. 언어로 빚은 예술의 가치를 모두가 한 번은 느꼈으면 한다.


여느 아이가 그렇듯 어릴 적 이야기를 좋아했다. 명작소설을 짧은 그림책으로 만든 시리즈가 있었다. 길지 않고 그림이 많아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재밌게 읽곤 했다. 《지킬 앤 하이드》에서 하이드를 두려워하고, 《홍당무》의 주인공을 불쌍히 여겼고, 《보물섬》 세계의 모험에 빠지기도 했다. 어머니표 영어 교육법의 일환으로 소설 오디오북을 정말 많이 들었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 듣는 식의 규칙이 있었는데 내용이 재밌으면 정해진 시간을 다 들어도 이야기에 빠지곤 했다. 《해리포터》 시리즈를 포함해 여러 판타지소설을 많이 접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배우는 문학은 그만큼의 즐거움이 없었다. 대부분 짧은 이야기나 소설에서 발췌된 작은 부분을 다뤘고 이야기에 집중하기보다는 작품의 의의, 성격, 인물의 특성에만 주목했다.


아직도 선명한 기억으로 8살, 처음 초등학교에서 시에 대해 배우고 집에서 혼자 동시를 만든 적이 있다. 작은 스케치북에 시를 쓰고 그림을 크게 하나씩 그렸다. 주사위를 소재로 한 시에는 반대편에 있는 숫자의 합이 7이라는 내용을, 포도를 소재로 한 시에는 송이송이 맺힌 모습이 가족 같다는 내용을 담았다. 누가 시킨 일도 아니었고 즐거운 마음으로 뿌듯하게 시를 썼었다. 그 후로 시를 본격적으로 써본 기억은 없지만 그때의 순수한 마음은 흐릿하게 연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로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문학을 내 손으로 만든 기억은 없다.


중학교 이상의 교육에서는 문학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특히 시를 공부하다 보면 시어와 어미 등에 각종 도형과 형형색색의 선을 그리게 된다.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나는 덕지덕지 칠해진 시가 불쌍하게 느껴지곤 했다. 숨기고 있기에 읽을 때 아름다운 함의가 모두 조각조각 드러나 있었다. 물론 문학 시간에 작품 분석의 방법을 배워야 함은 당연하지만, 교육의 종착지가 변별을 위한

시험이기에 문학을 감상하는 교육은 뒷전이 된다.


교과서에도 문학 작품 뒤에 감상을 적어보거나 다른 결말을 만들어 보는 등의 활동이 분명 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진도가 바쁜 교사에게나 시험을 치려는 학생에게나 무시당한다. 입시를 치르는 학생들에게 문학은 예술이 아닌 과목일 뿐이다. 고등학생이 되고 교육에 문제를 제기하며 수업 시간 중에 가장 큰 문제의식을 느낀 건 항상 국어 시간이었다. 사회나 자연과학은 그 본질이 원리의 탐구에 있다. 그렇기에 논리적으로 틀린 내용을 가르치지 않는 한 배움의 방식이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문학은 다르다. 문학은 사람과 삶을 이해하고 감정을 느끼며 세상을 대하는 태도를 배워가기 위해 존재한다. 아무리 시어의 유사성을 잘 파악하고 소설 속 소재의 쓰임을 이해해서 문제를 잘 풀어낸다고 해도 그것이 문학의 본질은 아니다.


문학은 순수하게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사회를 바꾸고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높은 수준의 문화다. 역사적으로도 소설가와 시인은 단순한 이야기꾼이 아닌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이었다.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조금은 개선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가 이해하는 문학의 가치다. 우리가 문학을 주로 만나게 되는 경로가 시험의 지문이라는 사실은 슬프다. 나 또한 문학을 시험에서 만났을 때 가장 일반적인 맥락에서 문제에 접근해 정답을 골라냈다. 하지만 문학의 본질은 문제를 위한 분석이 아닌 삶을 위한 해석에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당신이 문학을 수단으로만 여겼다면 소설을 통해 사회를 고발하고 시를 통해 성찰을 강조하던 문학인과 그 정신에 한없이 부끄러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2학년, 문학 시간이었다. 시를 배우면 보통 비슷한 주제의 시를 함께 배운다. 두 개의 시를 배웠다. 김수영 시인의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두 시의 공통된 주제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성찰’이었다. 언어에 민감한 나에게는 단어만으로도 감정이 유발되는 특수한 어휘가 몇 있다. 이상, 본질 등의 단어는 나를 꿈꾸게 하고 순응, 안주 등의 단어는 나를 움직이게 만든다. 이 시들을 배우며 나는 유독 커다란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꼈다.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화자는 작은 일에는 분개하지만, 큰일에는 나서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한다.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순수한 꿈을 외쳤던 청년들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현실에 안주하며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그린다. 담임 선생님이셨던 국어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내가 느끼기에 이 시들이 전하려는 바는 잘못된 것에 분개할 줄 아는 삶을 지향하자는 메시지였다. 쉽지 않음을 알지만 부끄러워하며 용기를 찾아가자는 것. 그렇지 못한 지금의 모습 혹은 과거로만 남긴 이상적 자아를 회상하는 모습을 통해서 시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시에서 그려진 내가 절대 되고 싶지 않은 인물의 모습은 나에게 엄청난 경각심을 일깨웠다. ‘이 시들의 주제는 소시민적 삶에 대한 성찰이다’라고만 짚고 넘어가는 수업은 놀랍도록 시가 외치는 목소리와 반대된 무엇이었다. 나아가 더 무섭게도 아무도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교육이 성장이 아닌 줄 세우기를 추구하며 문학을 아무도 예술로 받아들이지 않는 수동적인 교실의 모습. 비판 없이 시의 주제를 필기하는 학생들의 모습.

당장이라도 앞으로 뛰어나가 우리의 지금이 시가 말하고 있는 소시민적 삶의 모습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었다. 대신 노트를 펴서 격정을 유지한 채로 이 역설적인 상황에 관한 생각을 휘갈겼다. 의식이 죽어있는 교실에서 혼자 생명력을 지닌 듯 내적으로 의식이 폭발했던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나는 가방에 책 한 권과 시집 한 권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이 책은 나의 가방이 교과서나 문제집으로만 채워진 다른 친구들의 가방과 다르게 배움의 본질을 고민하는 사람의 것이라는 자존심의 상징과도 같았다. 책은 항상 바뀌었던 반면에 시집은 단 한 권,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정말 3년 내내 들고 다닌 기간에 비해 시집 전체를 읽은 횟수는 다섯 번 이하였던 것 같다. 하지만 시는 양으로 읽는 게 아니다. 시를 찾고 싶은 기분일 때 언제든 책을 꺼내 좋아하는 시를 찾아 읽었다. 가장 유명한 〈서시〉나 누구나 만나본 적 있을 법한 〈별 헤는 밤〉은 아예 전문을 외워버렸다.


나는 〈별 헤는 밤〉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모의고사를 풀고 시간이 남으면 큰 종이의 맨 뒷장에 〈별 헤는 밤〉을 필사하곤 했다. 내신 시험만큼은 아니지만 긴장감이 맴도는 모의고사를 치르는 교실의 생경함 속에서 시를 적으면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학교 강당에서 늦게까지 축제를 위해 연극을 연습하고 나와 운동장에서 별이 보였을 때 친구들에게 낭송해 준 적도 있다. 훈련소에서 야간행군을 할 때도 시를 좋아하던 동기와 이 시를 읊으며 무거운 발을 뗐던 기억도 난다.


사실 나는 시가 어렵다. 시를 써보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도통 시작하지 못했다. 단어 하나하나가 눌러 박힌 응축된 시보다 산문이 받아들이기 쉽다. 가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는 문장들과 그 배치. 그 속에 보석 같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어휘. 몇몇 시를 보며 문학이 왜 예술이 될 수 있는지 이해하게 된다. 나는 구구절절하게 논리를 풀어서 설명하는 글이 더 오히려 쉽고 산문을 쓰는 게 더 편하다. 그래서 언젠가 마음으로 시를 받아들일 수 있길 바라며 운문의 세계를 동경하기도 한다. 내가 본 사람 중, 시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아름답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내가 공명한다고 느꼈던 사람들의 삶에는 예술이 있고 시가 있었다. 나도 언젠가는 많은 말을 줄이고 함축을 익혀 좋은 시를 쓰고 싶다.


시가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의 세계로 느껴진다면 소설은 비교적 친근하다. 책은 이제 우리에게 친근한 매체가 아니지만 소설과 친구인 사람들은 여전히 자주 보인다. 나도 책이 잘 잡히지 않을 때 소설을 통해 읽는 재미를 다시 느끼고 독서를 다시 시작하곤 한다.

독서를 처음 시작하고는 인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유명하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소설을 일부러 찾아 읽기도 했다. 하지만 고전이 언제나 깊은 울림을 주지는 않았다. 하나의 예로 군대에서 나는 《죄와 벌》을 읽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완독은 했지만 그 과정은 고역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이 너무나 강한 감명을 준 책이라고 해서 염두에 두고 있다가 친한 친구의 추천을 계기로 책을 펼쳤다. 그러나 독백은 횡설수설해서 이해하기 어려웠고 인물은 과하게 극적으로 행동했다. 맥락이 이해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러시아식 이름은 책이 끝나갈 때까지도 눈에 익지도 않았다. 두꺼운 책을 두 권이나 꾸역꾸역 완독하고 나서도 나는 기대했던 복잡한 경험을 받지 못했다. 《멋진 신세계》의 치밀하지 못한 구성이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과한 종교성과 교훈적 특징도 그랬다. 몇 고전은 명성에 비해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주지 못했다. 좋은 고전도 물론 있었다. 《수레바퀴 아래서》나 《데미안》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벅차오름을 주기도 했고 《이방인》이나 《인간 실격》은 허무를 통해 인간 삶의 회의를 충격적으로 드러냈다.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의 말에 의하면 몇몇 고전이 어려운 이유는 이해를 위해 필요한 삶의 경험이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이해되지 않았던 책을 이후에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경험에 빗대어 보아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 삶의 이해가 깊어지면 고전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세계 문학 전집을 즐겨 읽는다는 친구에게 고전을 읽는 팁을 물어본 적이 있다. 다른 사람들의 관점을 찾아보거나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도움이 될 거라는 답변을 받았다. 실제로 고전 자체를 읽은 후 다른 책에서 그 내용의 개괄과 의의가 정리되면 고전이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고전 읽기의 실패를 통해 강박처럼 꼭 고전소설을 읽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오히려 사실적인 대화와 구성을 가진 현대소설이 훨씬 몰입력을 지닐 때가 많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많이 읽었고 잘 읽히는 소설을 가벼운 마음으로 찾았다.


특별한 깨달음이나 통찰을 주지 않아도 된다. 이야기를 즐기기만 해도 그걸로 좋다. 인간이 만들어 낸 허구의 세계를 통해 이야기가 주는 여행. 함축된 언어의 마술도, 인물을 통한 이야기도 좋다. 현대의 시는 음악이고, 소설은 영화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시에는 멜로디와 음악이 아닌 글자만을 통해 전달되는 원석 같은 아름다움이 있다. 가끔은 아름다운 어휘와 운율을 읽으며 떠오르는 심상을 따라가 보자. 화려하고 흥미진진한 영화만은 못해도 더욱 자세한 묘사와 치밀한 구성을 가진 소설도 꺼내보자. 그리고 느꼈으면 한다. 문학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내가 사랑하는 시 〈별 헤는 밤〉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희미한 별빛을 보며 가끔 고민한다. 나는 별 하나에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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