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의미와 친구

by 하얀거북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다. 생각이 펼쳐지는 의식의 세계는 나 혼자만이 평생을 지내는 곳이다. 타인의 의식은 우리에게 느껴지지 않는다.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우리는 그 사람의 내면에 관해 완벽히 무지하다. 언어를 빌려 대화할 수 있지만 의미는 언제나 유실된다. 본질의 대부분을 떠내려 보내고 한두 조각을 겨우 건져 각자의 주관대로 의미를 해석해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이 타인과 유대해야 한다. 그것은 존재의 필연적인 고립을 부정하기 위해서도, 잊기 위해서도 아니다. 자신만의 세계에서 충분한 성숙을 거쳐 의식의 외로움을 인지하고 난 후에는 세상으로 다시 나와야 한다. 있는 그대로 타인을 인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난 후에는 상대의 세계에서 의미의 조각을 한 두 개 건져낼 때 허무함이 아닌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그 조각은 나와 같은 의식적 존재를 증명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적인 고독을 인지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자신의 조각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 그러다가 가끔 같은 마음 조각으로 만나 공명하는 것. 나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깊은 관계란 이런 형태를 띤다고 믿는다.


사람을 아무리 만나도 허전하기만 하다면 오롯이 자신을 마주하는 시간을 갖고 존재의 필연적인 고독을 인정해야 할지 모른다. 반대로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에서 허무를 느낀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에게 다가서야 한다. 나는 후자의 상황에 가까웠다. 혼자만의 껍데기 속으로 숨어들기만 하던 나는 좋은 친구들 덕분에 관계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십 대의 후반을 지나며 나는 책에 빠져들었다. 모든 분야가 흥미로웠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책을 즐겨 읽는 친구가 주변에 없었다.

입시에 매몰되지 않는 쪽이 이상하게 여겨지는 시기,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이나 철학적 사고를 함께 나눌 동료는 없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는 반 친구들과 생각을 함께 나누고 토론하기도 하는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책상 앞에 함께 앉아있어도 지향점이 달랐다. 나는 출판을 목표로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사고를 키우는 길을 걷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글은 잘 써지지 않았고 교육의 모습은 여전히 나를 괴롭혔다. 나는 온갖 상념에 몸을 맡긴 채로 생각 속을 떠다녔다. 사무치게 외로웠다. 나의 사춘기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혼자 세상과 싸우려 들며 생긴 고통이었다.


외로움과는 별개로 친구는 많아졌다. 특히 열여덟을 기점으로 말솜씨가 늘며 사교성이 좋아졌다. 교내 대회를 나가며, 학생회와 일하며, 동아리를 하며 사람들을 사귀었다. 소심했던 예전에 비하면 놀라운 변화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갈 이유를 찾지 못했고 혼자 마음의 짐을 짊어졌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법을 몰랐다. 주변을 둘러봤을 때 정말 고마운 친구들이 많지만, 사람에게 다가설 수 있게 해 준 두 명의 좋은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성모는 정신적 외톨이를 자처하던 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다가와 준 고마운 친구다. 같은 반을 한 적은 없지만 같은 학원에 다니고 학교생활을 하며 자연스레 친해졌다. 고등학교 3학년은 나에게 오히려 잔잔한 시기였다. 담임 선생님은 반 학생들의 입시에 굳이 잔소리하지 않는 분이셨고 반의 분위기도 2학년에 비해 끈끈하지 않았다. 혼자 조용히 하는 일들이 늘었다. 졸업이 눈앞으로 다가와 가장 진지하게 출판을 준비하기도 했다. 1학기면 수시 성적이 마무리되고 2학기에는 수능이 있어 각자 긴장과 느슨해짐의 시기가 달라 묘한 흐름의 학교생활을 했다.

이 시기 성모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별한 활동은 없었다. 주로 산책하며 이야기를 많이 했다. 주변엔 학원밖에 없는 동네 구석구석을 빙빙 돌며 하염없이 대화를 나누곤 했다. 내가 비교적 자유분방하고 열정적인 성격이라면 성모는 그 반대에 가깝다. 강직하고 성실하며 차분하다. 그리고 친구들을 잘 챙겼다. 처음에는 잘 맞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먼저 전화가 오거나 만나자는 말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적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기대본 적 없는 나는 그랬다. 그리고 나와 생각하는 방식과 관심사가 다르기에 처음에는 친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생각은 당시 나의 오만에서 비롯된 착각이었다. 이야기에 서로 흥이 올라 열의를 쏟아내는 대화의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성모는 나의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수많은 기대와 불안으로 가득 찬 나와 하는 대화를 흥미롭게 여겼다. 우리는 작은 지식으로도 정의나 사회나 과학이나 삶 따위를 이야기했다. 세상에 대한 서로의 관점을 이해하고 생각을 나눴다. 학교생활이나 미래, 가족 이야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이 시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의지하는 면이 있었다. 나는 안정과 항상성 비슷한 것을, 성모는 삶의 변주와 혁신 비슷한 무언가를 서로에게서 찾았다. 성모는 유독 사람들을 잘 챙겼다. 무슨 일이 있으면 축하나 위로를 건네주는 사람이었고 주변 사람들에게 돈 쓰는 일을 아까워하지 않는 베푸는 친구였다. 친구들과 연을 계속 이어가고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먼저 다가선 적이 없던 나에게는 그 모습이 처음엔 의아했지만, 나중에는 그 가치에 통감하게 되었다.


고마운 마음을 꼭 전하고 싶은 다른 친구는 태우다.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우리는 초등학교 2학년, 같은 반을 하며 친해졌다. 어렸을 적엔 말수도 적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는 데에 적극성이 없던 나와 다르게 태우는 어릴 때부터 활달하고 사람을 모으는 재주가 있었다. 같은 중학교에 진학해 2학년에 다시 같은 반이 되었다. 태우나 창헌을 포함해 마음이 잘 맞는 친구들이 많았다. 가장 싫어했던 담임 선생님과는 별개로 즐거운 1년을 보냈다. 그 후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며 태우와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만약 우리가 자연스레 멀어졌더라도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고등학생은 사춘기를 겪으며 크게 변하는 시기이자 사회의 요구에 의해서도 가장 바빴어야 할 때였다. 나는 내 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고립되어 가고 있었고 친구를 먼저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고등학교에 다니는 동안, 같은 학원에 다녔던 3학년의 말미를 제외하고는 태우와 자주 만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계속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건 태우가 나에게 손을 뻗어주었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생일을 외우고 챙기던 태우 덕분에 잠깐이라도 친구들이 모여 케이크와 함께 생일을 축하받기도 했고 축하해 주러 가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다고 생각했던 한 생일에 친구들에게 받은 축하와 케이크는 지친 삶에 큰 감동을 줬다.


그리고 다시 태우와 자주 만날 수 있던 시기는 코로나가 세상을 멈췄던 스물의 초반이었다. 나와 태우와 창헌의 집은 각각 5분 거리 이내에 있었다. 부담 없이 불러낼 수 있는 친구들과 정말 자주 놀았다. 오랜 동네 친구가 주는 느낌은 정말 좋았다. 특별하지 않아도 즐거운 일상이었고 대학생보다는 백수에 가까운 삶을 즐겼다. 상반기가 지나기 전에 나는 기숙사에 입사했고 그 후 함께 지내는 긴 시기는 없더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가장 오래된 이 친구들과 만난다.

또 태우는 나에게 일상을 공유하는 감각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다.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거대한 문제들에 정신을 쏟고 관념에만 몰두하던 나에게 오늘 하루가 어땠고 무엇을 먹었는지의 삶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 자신에게 무신경했고 일상에서 즐거움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가끔 태우에게서 전화가 와 학교의 누가 어쨌고 오늘 먹은 빵이 맛있었다느니 하는 얘기를 들어도 감흥이 없었다. 솔직히 조금 귀찮기도 했다.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 삶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그렇게 하지 않던 나였다. 그러나 그런 잡담을 계속하고, 나도 내 이야기를 하며 일상을 공유하는 게 즐겁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삶이란 결국 생각의 구름 속을 헤매는 것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땅에 발붙여 살아가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삶을 긍정하면서 미래를 계획하고 관념 속으로 가끔 빠져들면 된다. 안정적인 일상을 가꾸는 일의 중요성을 나는 친구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나를 잘 아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은 좋다. 좋은 친구 한 명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도 하던가. 언제 만나도 편히 대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행운이다. 진정한 친구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요소

는 무엇일까. 나는 성향의 일치라고 생각했었다. 나와 사고의 결이 비슷하여 공명하는 사람만이 가장 깊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실제로 나와 유독 더 잘 맞는 친구들이 있다. 성모나 태우가 내 친구들 중 가장 나와 비슷한가? 그렇지 않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친구들은 오히려 나와 특성이 달라 주변 사람들을 잘 챙겼기에 정 없게 굴던 나에게도 다가와 주었다. 이 시기 먼저 손을 뻗어준 친구가 내 주변에 없었다면 나는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다가서는 법도,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내린 결론은, 관계에 있어서는 함께하는 시간의 역할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성격이 다르고 관심사가 달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만난 적 없는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 세상에는 나와 비슷한 사람이 분명 많겠지만 그들은 낯선 누군가일 뿐 나의 친구가 아니다. 실제로 함께한 시간이 있고 공유하는 기억이 있는 사람과 우리는 관계를 쌓는다. 관계를 이어가려는 노력이 있다면 자주 연락이 닿지 않더라도 신뢰와 안정감, 친밀도는 오른다. 시간은 그런 역할을 한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을 때 그 시작은 간단하다. 일단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면 된다. 사람을 먼저 찾을 줄 아는 사람이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친구들에게 배웠다.


다음 단계로는 시간의 밀도를 올릴 수 있다. 이것은 내가 가진 특기 중 하나다. 나는 사람을 여럿보다 둘이 만나기를 좋아한다. 셋 이상이 모이면 누군가 소외되지 않는지, 분위기가 어떤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둘이 있을 때는 온전히 상대에게 집중할 수 있다. 고민거리나 하루하루 사는 이야기를 하더라도 내일이면 잊어버릴 잡담보다 기억에 남을 수 있는 대화를 이끌어 가려고 한다. 인문학은 그런 깊은 대화에 큰 도움이 된다. 작은 지식 조각들은 어떤 현상을 명료하게 설명하거나 궁금증을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어준다.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 항상 시답잖은 얘기나 하기 마련인데 나를 만나면 생산적인 대화를 하게 된다고 말해주는 친구들이 꽤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누군가가 나를 좋은 친구로 생각한다는 사실에 기쁘다. 긍정적인 영향을 조금씩이나마 펼친다는 느낌이 행복하기도 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실체를 가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사랑, 우정, 믿음, 기대와 같은 관념은 허상일지도 모른다. 오직 자신의 의식만을 살아가기에 나는 본질적으로 사람은 고독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타인이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시간을 함께하고, 같이 걸으며, 일상을 공유하기도 하는 것. 친구를 사귐은 마음을 충만하게 하는 일이며 의식의 존재를 확인하게 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 다가서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나는 좋은 친구들 덕에 사람을 더욱 믿게 되었고 한 발짝 내딛는 데에 용기를 얻었다. 좋은 친구들을 보며 나도 누군가에게 좋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항상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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