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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조 May 20. 2024

'명품'에 대한 지극히 주관적인 고찰

'일단은' 사지 않기로 했다.

나는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힙하게 입거나 유행을 따라가진 않는다. 추구하는 미(美)가 확고한 편이고 어떤 룩이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지 잘 알고 있어서 약간의 포인트 요소만 달라질 뿐 전체적인 무드는 비슷하다.


키가 160대 후반이고 상체가 짧고 팔다리가 긴, 서구형 체형에 가깝다. 어깨는 넓지도, 좁지도 않고 조금 마른 편에 속한다. 그래서 귀엽거나 과하게 여성스러운 코디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요즘 소위 말하는 '올드머니룩'이 내겐 가장 베스트다. 올드머니룩이란 단어가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고수하던 스타일이었는데 괜히 유행을 따라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가끔 비슷한 코디를 한 사람을 마주치면 민망할 때가 있다.


올드머니룩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명품'이 떠오른다. 보통 큰 포인트 없이 톤온톤으로 매치하거나 단순한 색조합으로 입는데 가방이 포인트가 되곤 한다. 이때 가방까지 너무 밋밋하면 그저 '노잼룩'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몇 해 전부터 '명품'에 관심이 많아졌다.


첫 시작은 그냥 구경만 하러 간 아웃렛에서 프라다 가방을 구매한 날이다. 다른 브랜드도 구경하다 보니 가방을 하나 장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프라다 매장에서 데스티니를 만났다. 평소 '프라다' 하면 블랙 정장을 입은 딱딱한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막상 들어보니 발랄한 룩에도 적당한 무게감을 실어줘 어디에든 어울리는 가방이었다. 평소 절대 하지 않는 할부까지 해가며 결제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고민은 10분도 채 하지 않았다. 결혼식, 데이트, 모임 장소 등 어디든 잘 들고 다녀서 절대 후회 없는 선택이긴 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수백만 원을 한 번에 결제한 경험을 해버린 나는, 그다음이 자꾸 쉬워졌다. 하나로는 부족하게 느껴졌고 용도별로 구비해두고 싶어졌다. 그리고 제일 치명적인 건,


SNS 피드 사진에 가방이 겹치는 게 싫어졌다.


SNS 팔로워 수는 300명대로 많지 않다. 그중에서도 광고나 해외 잡다한 계정을 제외하고 정말 나를 아는 지인만 세보자면 20명도 될까 말 까다. 말로는 SNS에 나의 소소한 일상을 기록한다 해놓고선 나도 모르는 본심은 그저 자랑이었던 것 같다. 아니, 자랑이 맞다. 좋은 것만 올리게 되니까. 어딜 가면 업로드할 사진을 찍게 되고 그날의 착장이 잘 보이도록 나를 남긴다. 옷이든 가방이든 로고는 은근슬쩍 보이도록 각도를 맞추는 것까지 계산에 들어간다.


그러던 올해 나의 생일. 명품 가방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올해는 30살이 되는 생일이었다. 남들이 30살은 느낌이 다르다며 의미 부여하면서 고가의 셀프 선물을 했다는 포스팅을 보고 또다시 구매 욕구가 올라오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문득, '정말 이걸 필요해서 사는 건가?' 스스로 의문이 생겼다. 사고 싶다는 욕망과 사도 된다는 합리화가 엉켜 마음에 드는 디자인 하나만 걸려라 하는 상태였다. 의문이 드는 순간 명품 브랜드별 가방 디자인을 서치 하는 게 그다지 기분 좋지 않아 졌다.


정말 필요한가?

(아니. 30살+생일+셀프선물이라는 키워드에 갇혔다.)


이걸 사면 정말 행복할까?

(가방을 검색하는 과정부터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는걸?)


그 행복이 얼마나 갈까?

(결국 가방도 필요에 의해 쓰는 물건. 행복보단 필요에 의해 쓰게 되겠지.)


가지고 있는 가방 중 해진 가방이 있나?

(아니. 모두 깨끗하다.)


갖고 싶은 가방과 똑같은 사이즈의 가방이 또 있지 않나?

(그렇다. 매번 비슷한 사이즈, 비슷한 수납력의 가방을 산다.)



그래서 사지 않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사지 않기로 마음먹은 순간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졌다. 유튜브에서 아무리 예쁜 가방을 소개해도 사고 싶다는 마음 없이 보니 그냥 구경거리가 될 뿐이었다. 이 마음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소 1년은 지켜보려고 한다. 비싼 물건을 소유하고 자랑하는 가치보다 더 큰 가치를 알아가고 싶다.


남들과 비교하지 말자. 내가 남들이 가진 것 중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충분히 채워져 있다. 그럼에도 더 채우는 것은 분에 넘치는 일이다. 나보다 잘난 사람은 수없이 많다. 남들이 가진 것을 나도 갖겠다고 비교하는 순간 나는 채울 수 없는 독에 물을 붓기 시작해야 한다. 나는 나대로 살 줄 아는 심지가 필요하다.


과연 그 로고가 없어도 그 가방을 살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아니요'에 더 기운다. 솔직히 정말 특이한 가방 말곤 로고가 9할이라고 느껴진다. 특이한 가방은 애초에 내 눈에 들어오지도 않겠지. 그럼 평범한 가방은 로고 없으면 다른 가죽 가방과 다를 바가 없을 텐데 수백만 원을 주고 몇 개나 산다는 건 객관적으로 내 분에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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