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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멈춰야 비로소, 다시 걸을 수 있다."

by 호주아재

새벽 6시.
어둠을 뚫고 호텔 주방으로 들어가는 길은
마치 대사 없이 매일 다른 공연을 준비하는 무대 뒤 같았다.
주방은 각자의 리듬으로 숨 쉬었고,
나는 하루 15시간, 주 5일의 긴 무대를 8개월째 이어가고 있었다.
박수도, 커튼콜도 없는 공연이었다.

조식 뷔페, 점심 A la carte, 프라이빗 디너 코스까지.
쉐라톤의 하루는 리허설 없이 다음 장면으로 밀려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 몸은 조용히 무너져가고 있었다.

9개월이 지나고, 자연스레 몸무게가 10kg이 넘게 빠졌다.
"와, 살 많이 빠졌네."
사람들은 가볍게 웃었지만,
그게 과로 때문일 거라고는 아무도 묻지 않았다.

하루가 끝나면,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했다.
팔을 타고 내려오는 통증, 진통제가 없으면 프라이팬조차 들 수 없던 테니스엘보. 손끝엔 습진이 번지고, 보호대로 감싼 팔꿈치와 예전 수술 흉터가 있는 무릎은 하루하루 버티는 데 급급했다.

그날도 다르지 않았다.
도마 앞에 서 있다가,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손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휘청였다.
갑자기 바닥이 가까워졌고,

쾅!!!...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주방이 멈췄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리도 안 들리고, 얼굴도 흐릿했다.
"내 몸이 먼저 멈춰버렸다. 마치 오래된 기계처럼, 예고도 없이..."

정적 속, 동료들이 달려왔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이제는, 정말 한계인가.'




그날 밤, 아내에게 말했다.
"나... 이젠 안 될 것 같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 손을 잡았다.
잠시 후, 조용히 말했다.

"이제 좀 쉬자.
10년 동안 정말 열심히 달려왔잖아."

그 말에, 문득 울컥했다.
버텨야만 한다고 믿었던 마음이
처음으로 멈춰 섰다.





며칠 뒤, 사직서를 제출했다.
아쉽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더는, 내 몸이 이 속도를 따라갈 수 없었다.

절실하게 회복이 필요했다.
세 살이 된 아이와도,
나 자신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렇게 살려고 호주에 이민 온 게 아닌데...

이제는 주변 호주인들처럼 여유있는 삶을 사며, 사람답게 살고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결심했다.
한국으로 가자.
치료도 받고,
무엇보다, 그리운 가족과 친구들을 만나러...

결혼 후 처음 떠나는,
스케줄 없는 비행.
아이와 함께하는 첫 여행.

공항 탑승 게이트를 지나며
이상하리만큼 긴장됐다.
설렘, 아쉬움, 그리고 묘한 해방감.
비행기 창밖 하늘을 보며,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이젠, 나도 나를 좀 챙겨야 할 때야.'

10년 넘게 매일 끓어오르던 주방을 벗어나
잠시 멈추는 시간... 그건 도망이 아니라,
다시 걷기 위한 숨 고르기였다.


*처음 제 에세이를 접하시는 분들께*

3권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웰던인생, 미디엄레어 꿈"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 1권과 2권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있고 생생하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정주행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oju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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