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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살기위해,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선택

by 호주아재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데이오프로 집에서 쉬고 있던 어느 날.
오랜만에 아내랑 여유로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는데, 아내가 아주 조심스럽고도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 여기서 하고 싶었던 공부 좀 해보고 싶어."

나는 별로 대수롭지 않게, 그냥 흘려듣듯 말했다.
"어! 공부하고 싶은 건 당연히 해야지. 공부한다고 하면 안 말려."

그런데 그다음 말은 좀 달랐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 시민권 신청하면 안 될까?"

"어? 갑자기?"

그 순간 머릿속에서 '왜?'라는 질문이 수십 번은 튀어나왔다.
그런데 이어지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할 말을 잃었다.

"호주는 결혼하면 보통 아내가 남편 성을 따르잖아. 근데 우리가족은 나는 박 씨, 당신은 이 씨. 아이는 이 씨. 나중에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이나 친구들이 물어볼 거야. 왜 엄마 성이 다르냐고. 그럼 그냥 '문화 차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어. 마치 우리가 이혼했거나, 내가 친엄마가 아닌 아빠의 여자친구 같은... 그런 시선으로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하더라고."

그 말에 가슴 한쪽이 턱 하고 내려앉았다.
'그걸 아이가 느끼게 된다면...'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순간은 꼭 맞고 넘어져서가 아니라, 그런 말 한마디, 그런 시선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아이에게 "너는 한국인 문화에서 태어난 거야"라고 설명한들, 그 어린 마음이 다 받아들이기엔 벅찰 수도 있겠지.

게다가 아내는 시민권을 취득하면 호주 정부에서 제공하는 대학 등록금 보조 프로그램도 이용할 수 있다고 했다.
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까지 정부에서 전액 지원을 받아 등록금 부담 없이 공부할 수 있고, 졸업 후 취업해서 일정 연봉 이상이 되면 천천히 갚아나가는 시스템.
그걸 이용해서 아내는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싶다고 했다. 이 나라에서 자신만의 길을, 자기 이름을 가진 커리어를 쌓고 싶다고...

그래서 결국, 우리는 시민권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래! 이왕 하는 거, 그럼 제대로 해보자.'
나와 아내는 두 달 동안 진짜 독하게 마음먹고 공부했고, 결국 시험에서 100점을 받았다.

시험 감독이 점수를 확인하더니 "1년에 이런 점수받는 사람 거의 없어요!"라며 먼저 들떠서

"빨리 사진 찍어요, 기록으로 남겨야지!"라며 사진까지 찍어줬다.
그 순간만큼은 우리 둘 다, 마치 고등학교 졸업식처럼 웃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Lee Family'가 되었다.
법적인 패밀리 네임은 바뀌었지만, 피는 바뀌지 않는다.
우린 여전히 '이 씨'이고 '박 씨'이고, 무엇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의 피를 가진 가족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서운했다.
'우리가 이제 한국 사람이 아닌 건가?'
'이걸로 내가 뭔가를 포기한 걸까?'
그 이름 석 자에 담긴 지난 시간들, 뿌리 같은 것들이 스르르 멀어지는 느낌.
그게 마음 한구석에 묘한 허전함을 남겼다.

하지만 곧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이건 포기가 아니다.
그저 우리 가족이 여기서 더 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한 준비일 뿐...
아이가 혼란스럽지 않게, 아내가 꿈을 포기하지 않게, 그리고 우리 가족이 함께 '우리답게'살아가기 위한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해야만 했던 선택.
그 선택 덕분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그게 이민자 가족이 이 땅에서 살아남는 방식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내가 끝까지 지키고 싶었던 게 딱 하나 있었다.

바로 내 이름,
'Minho Lee.'

영어 이름으로 바꾸라는 사람도 있었고,
발음하기 쉬운 닉네임을 만들라는 조언도 많았지만 나는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히 말했다.

"I’m Minho."

그건 내 이름이고, 내 뿌리이며,
내가 걸어온 시간들이 담긴 이름이니까.

10년 전, 리지스 호텔에서
사람들이 나를 '이안'이라 불렀던 그 시절,
조용히 마음속으로 했던 나의 다짐.
"이국의 땅에서 살아가더라도,
내 이름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기를.
그 이름을 지켜내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니까."

그 다짐을 지켜내기 위해, 진짜 나답게 빛나기 위해. 호주 시민이 되었어도, 나는 변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이민호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이 땅에서 내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처음 제 에세이를 접하시는 분들께*

3권에 담긴 모든 이야기는 "웰던인생, 미디엄레어 꿈" 1권에서부터 이어지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아직 1권과 2권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계시다면,
처음부터 차례대로 읽어주시면 더욱 깊이 있고 생생하게 다가올 거라 생각합니다.
정주행을 추천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hojua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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