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주의 체감 온도는 36도,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다.
햇볕은 겨울이라는 단어를 가볍게 밀어내고 정수리 위로 내려앉는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반팔 차림 속에서 사진 속 장식처럼 서 있다. 대중교통을 빼면 도시는 잠시 멈춘다. 카페도, 상점도, 쇼핑센터도 대부분 문을 닫는다. 유리문에 붙은 'Closed'라는 안내문이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다. 오늘 하루를 설명해 주는 말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가 아니라, 굳이 나갈 이유가 없는 하루를 보낸다.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집에 모이고, 마당에서는 바비큐 그릴이 달궈지며, 고기 익는 냄새가 오후의 속도를 늦춘다. 아이들은 작은 수영장에서 물장난을 치며 웃고, 어른들은 그늘에 앉아 맥주 캔을 하나씩 들고 시간을 흘려보낸다. 해변에서는 타월을 깔아놓고 천천히 바다로 들어간다. 산타 모자를 쓴 채 서핑보드를 들고 걷는 모습도 이 날엔 전혀 어색하지 않다. 호주의 크리스마스는 축제라기보다 휴식에 가깝다. 조용하고, 평온하며, 느슨하다.
이 분위기는 하루면 충분하다.
다음 날이 되면 공기가 달라진다. 이름부터 다른 날, 'Boxing Day'다. 어제 닫혀 있던 문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열린다. 명품숍을 포함해 거의 모든 상점이 50퍼센트는 기본이고, 많게는 70퍼센트까지 세일을 시작한다. 쇼핑센터 주차장은 새벽부터 차로 가득 차고, 문 앞에는 문 열리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을 선다. 늘 느긋하던 호주식 쇼핑 풍경도 이 날만큼은 조금 분주해진다.
이 하루를 위해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신발 하나, 가방 하나가 즉흥적인 선택이 아니라 오래 기다린 끝에 손에 쥔 물건처럼 느껴진다. 크리스마스에 굳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은 쉬고, 내일을 위해 남겨 두는 방식이다.
하루 차이인데 풍경은 완전히 다르다. 가족과 시간을 보내던 하루와 계산대 앞에 서 있는 하루가 연달아 이어진다.
호주의 여름 크리스마스는 이 대비가 유난히 또렷하다. 땀에 젖은 셔츠와 바닷물의 소금기, 그리고 다음 날 손에 들린 쇼핑백까지, 모두 같은 계절 안에 있다.
그래서 이 나라의 연말은 현실적이다. 쉼과 소비를 굳이 분리하지 않는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내일은 무언가를 사도 괜찮다. 그 정도의 여유가 이 계절을 편안하게 만든다.
36도의 크리스마스와 그 다음 날의 박싱데이.
호주의 연말은 그렇게 하루 간격으로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멀리 호주에서 한여름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며,
한국에 계신 작가님들께도 마음을 보낸다.
각자의 자리에서 써 내려간 문장들이
연말의 공기처럼 천천히 숨을 고를 수 있기를 바라며,
사람의 온기 닿는 하루, 따뜻한 사람들 곁에서
포근하고 편안한 크리스마스를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