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너 영어 이름 없어?”
주방에 막 들어선 나를 힐끗 보던 셰프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 말투가 묘하게 자연스러우면서도, 마치 ‘너 아직도 한글 이름으로 살고 있냐?’는 표정이었다.
나는 순간 머릿속이 살짝 얼어붙었다.
‘민호’… 부르기 그렇게 힘든가? 스펠링도 간단한데. M-I-N-H-O. 간결하고 직관적인 다섯 글자.
“학교에서 쓰는 이름 있긴 한데요… 'Ian'이라고 해요. 근데 뭐,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그 셰프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눈을 반짝였다.
“이안? 그런데 무슨 의미가 있는 거야? 그 많은 이름 중에 왜 하필 ‘이안’을 선택한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호주의 수영 영웅 '이안 소프' 알죠?
그냥… 걔 이름이면 다들 기억하잖아요.
어차피 외국 이름 쓸 거, 좀 익숙한 걸로 하려고...”
그 셰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 현명한 선택인데?”
“이안?? 오, 좋아. 민호도 나쁘진 않지만, ‘이안’이 훨씬 입에 착 감긴다. 딱 들으면 호주 사람 같잖아!”
그리고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선언하듯 말했다.
“좋아, 앞으로 넌 '이안'이야. 알았지?”
그리고 마치 신호탄이 터진 듯,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셰프들이 갑자기 나를 향해 외쳤다.
"Hey, Ian!"
"What's up, Ian?"
"Ian! Get over here!"
이 상황 뭐지? 갑자기 호그와트 입학식처럼 이름이 ‘이안’으로 정해졌고, 난 이름 바꾼 걸 축하받고 있는 분위기였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민호’였던 나는, 순식간에 ‘이안’으로 세례 받고 부활한 셈이었다.
이 정도면 성경에 나와야 한다.
"그날, 민호는 죽고, 이안이 태어났더라…”
심지어 옆에서 과일을 자르고 있던 셰프마저 칼질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음… ‘이안’이라… 그래, ‘민호’보단 덜 꼬이겠네.”
뭐가 꼬인다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그날부로 완벽하게 '이안'이 되었다.
"에잇!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오빠"라고 할걸..." 뒤늦은 후회는 항상 한 박자 늦는다.
그날 이후로 난 깨달았다.
여기서 ‘민호’는 없다.
이제 난 어디서든 “Hey, Ian!” 하면 반사적으로 돌아보는 몸이 되어버렸다.
이름 하나 갈아탔을 뿐인데, 마치 인생 리셋 버튼 누른 기분이랄까?"
아무리 ‘이안’으로 살아도,
내 마음 깊은 곳엔 어머니가 지어주신 이름
'민호'가 있다.
어쩌면 지금은 ‘이안’이란 이름으로 더 많은 걸 해내야 하는 시기일지도 모르지만,
반드시 언젠가는 다시 내 이름을 자랑스럽게 부를 날이 올 것이다."
"나는 다짐했다."
이국의 땅에서 살아가더라도, 내 이름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기를...
그 이름을 지켜내는 건,
결국 나 자신이니까.
'What’s your name?'
언제든지 누군가가 물었을 때,
나는 당당히 웃으며 말할 것이다.
'Hi, I'm Minho.'
그때의 나는,
조금 더 나답게 빛나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