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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스크램블 된 나의 첫 요리 인생"

'노른자 하나에 내 멘털이 터졌다'

by 호주아재

칼질만 하다 보니 어느새 고수가 되어 있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3개월 동안 오로지 껍질 까고, 자르고, 다지고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칼질 달인이 되어버린 거다.

호텔 주방에서 배우는 칼질법도 어찌나 다양한지. 기본적인 슬라이스(Slice), 다이스(Dice), 줄리엔(Julienne), 브루노아(Brunoise)부터 시작해서 시포나드(Chiffonade), 콘카세(Concassé), 페이장(Paysanne), 롱기튜디널(Longitudinal)까지.
처음엔 "이거 그냥 썰면 되는 거 아냐?" 싶었는데,
나중엔 "줄리엔은 3mm×3mm×5cm, 바토네는 6mm×6mm×6cm" 외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나의 똥손은 서서히 “어우, 칼질 좀 하네?” 소리 듣는 손으로 진화 중이었다.

하지만 실습생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보통은 주방에서 온갖 허드렛일 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다음 레스토랑으로 로테이션되는 게 국룰.
나도 2주 뒤면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수셰프가 나를 사무실로 부르는 거다.

“이안!! 너 아무 데도 못 가!”

엥? 뭐지? 갑자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무슨 의미야? 어딜 못 가?”

알고 보니, 3개월간 뛰어다니며 몸이 부서져라 일하던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수셰프가 학교 담당자한테 직접 전화까지 걸어서 "얘는 내가 더 가르쳐야 합니다!”
라고 사수 신청을 한 거다.

‘헐! 이 새끼가 미친 듯이 일만 해주니까 정말 편해진 거 아냐? 나를 그냥 노동력으로 쓰겠다는 거지?!’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집도 가까웠고, 다른 주방 가봤자 똑같은 일이나 할 텐데… 여기가 낫겠다 싶어서 흔쾌히 OK 했다.

그런데…

내가 수셰프한테 “이 새끼”라고 했던 판단이 180도 잘못되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단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이제부터 내 인생의 첫 번째 하드코어 셰프 훈련이 시작된 거다.

“프라이팬 이렇게 잡고, 딥프라이어는 이렇게, 오븐은 이렇게… 고기는 이렇게 굽고, 튀김은 이렇게 해야 바삭하지! 가져와 봐! 맛볼게!”

아니, 이게 뭐야?
재료 손질만 하던 나에게 이제 진짜 요리를 가르쳐 주겠다고?




첫날은 계란 프라이부터 시작했다.

“너 요리할 줄 알아?”
“네! 계란 프라이는 잘해요!”
그랬더니 수셰프가 킥킥 웃더니 말했다.
“좋아. 그럼 오늘은 써니 사이드업, 오버이지, 오버하드, 바스켓 토스트까지 전부 해봐.”

그 순간부터 계란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써니 사이드업은 기름 튀어서 손등 데고,
오버이지는 뒤집다가 노른자 터지고,
오버하드는… 어차피 터질 거 그냥 처음부터 으깨서 시작했고,
마지막 바스켓 토스트는… 계란이 식빵을 탈출해서 팬 위에서 자유를 외쳤다.

수셰프는 조용히 내 쟁반을 보더니 말했다.
“이게… 프라이라고? 나에겐 그냥 프라이 난장판인데?”

우리가 흔히 해 먹는 사소한 계란 프라이조차도
불 조절 하나, 기름 한 방울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과 맛으로 태어난다는 사실도 그날 알게 되었다.

그렇게 계란 하나로 내 자존심이 스크램블 되는 소리 들었다.

이후엔 파스타를 배웠는데, 면 삶는 시간이 30초만 지나도
“이제 물에 빠져 죽었다!”며
면을 휴지통에 던져 버리고 다시 삶아!!

그렇게 혹독한 트레이닝이 시작됐고, 나는 요리를 배운다기보단 훈련받는 기분이었다.

그때 만난 내 요리 멘토이자, 지금은 둘도 없는 호주인 친구 "Alfie Maurer(알피)".

나보다 세 살 어린데, 이미 호텔에서 수셰프로 일하고 있었고, 실력은 말 그대로 끝판왕급.
15살 때부터 요리의 길을 걸으며, 주방에서 진짜 셰프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다는 얘기를 듣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와... 얘는 15살에 이미 주방을 자신의 전장으로 만들었구나.”
그 당시의 그는 마치 칼 대신 마법 지팡이를 들고 있는 해리포터 셰프처럼 보였고,
솔직히 말해, 그의 멋짐이 그때부터 나의 롤모델이 됐다.




“알피랑 같이 일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웠다.
그는 언제나 진지하게 요리에 임했고, 늘 작은 디테일 하나에도 엄청난 집중력을 보였다. 물론 우리도 사람인지라 가끔은 장난도 쳤다.
예를 들면, 어느 날은 요리에 몰래 매운 고추를 넣었다가 셰프들이 불을 뿜으며 욕을 퍼부었고,


또 어떤 날은 토마토케첩에 고추장과 소금을 섞어 ‘신메뉴’라며 맛보라고 했고, 그걸 입에 넣은 셰프가 갑자기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헉! 이건 음식이 아니라 무기야!’라고 외쳤다.
그 순간 주방이 정지되고… 욕 랩 배틀이 시작됐다.

“What the f---?! Who the h--- put this sh-- in my f------ dish?!”

그리고 옆에서 다른 셰프가 마이크라도 쥔 듯 받아쳤다:
“This ain’t a sauce, it’s a war crime, man!”

마치 주방이 힙합 클럽이라도 된 듯,
셰프들끼리 욕으로 플로우를 주고받는데,
내 귀엔 그게 마치…
옥스퍼드 영어 욕 사전이 힙합 앨범으로 나왔다면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들조차도, ‘맛’과 ‘경계’를 아는 훈련이었다.
요리는 진지해야 하지만, 그 안에서 웃음과 유쾌함도 중요하다는 걸 알피를 보며 배웠다.”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우린 그냥 동료가 아니라, 진짜 전우처럼 서로를 믿고 의지하게 됐던 것 같다.


뜨거운 팬 앞에서 땀을 흘리고, 불 앞에서 욕을 먹고,
그 모든 걸 함께 버틴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끈끈함—
그게 바로 주방에서 피어나는 우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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