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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영주권의 덫, 꿈 앞에서 무릎 꿇다"

by 호주아재

알피에게 양식의 기초부터 하나하나 배운 지 어느새 1년.
다른 학생들은 이미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네 번의 로테이션 실습을 대부분 마치고, 호텔 매니지먼트 이론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실습을 1주일 남기고 있었다.
여전히 같은 주방, 같은 셰프들과 일하며 이제는 그들의 가족관계, 애완견 이름, 심지어 주말 취미까지 다 알 정도로 친밀해졌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영주권.
1년 동안 호텔에서 실습하며 영주권 신청에 필요한 1040시간의 주방 경력을 쌓았고, 이제는 학교 졸업을 위한 이론 공부와 IELTS 시험 준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듣게 됐다.

영주권 법이 바뀌었다는 거다.

'벼락이 떨어진다는 게 이런 건가.'

이제는 1040시간의 실습 경력만으로는 부족했다.
그에 더해, 2년간 관련 업종에서의 근무 경력을 입증해야만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공부를 시작할 땐 단순했다.
관련 학과 졸업, Chef Certificate 취득, 1040시간의 경력, 그리고 IELTS each band score 5.0.
이 네 가지만 채우면 영주권 신청에 문제가 없다는 말만 믿고, 나는 모든 걸 쏟아부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갑자기 2년? 그것도 실습이 아니라 진짜 취업 경력으로?

당시 셰프라는 직업은 호주 영주권 취득이 비교적 쉬운 ‘부족 직업군’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하지만 일이 워낙 고되고 피곤하다 보니, 정작 현지인들은 꺼리는 경우가 많았고, 많은 외국인들이 영주권을 받자마자 다른 직종으로 전향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법을 바꾼 것이었다.

"하… 내가 이 바뀐 법의 첫 번째 희생양인가…?"

입에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눈앞이 깜깜했다.
계획했던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공부, 실습, 시험 준비… 그 모든 수고가 허망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없었다.
당장 취업을 해야만 했다.

나는 곧장 알피를 찾아가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흔쾌히 호텔의 Executive Chef, 그러니까 호텔 총괄 셰프와의 미팅을 잡아 주었다.
"아, 이 셰프가 내 인생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거구나!"
나는 모든 걸 걸고, 이력서를 정리하고 인터뷰 예상 질문에 대한 답변도 철저하게 준비했다.

운명의 인터뷰, 그리고 불안의 시작

드디어 운명의 날.
긴장 반, 설렘 반.
아니, 솔직히 말하면… 양가 상견례 보다 백 배는 더 중요했다.
‘긴장하지 마. 연습 많이 했잖아.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넌 할 수 있어.’

Executive Chef는 평소처럼 반갑게 나를 맞아주었다.
매일 얼굴 보던 사이였고, 가끔 농담도 나누던 사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유난히 손이 떨리고, 목소리가 말라붙는 것 같았다.

분위기는 좋았다.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속으로 외쳤다.
‘이건 취업 확정이다!’

그런데…
그 순간, 셰프의 표정이 진지해지며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이안, 네가 성실하게 일하는 것도 알고, 많은 셰프들이 너를 추천해 줬어.
근데… 참 마음이 무겁고 괴롭다.”

‘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셰프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지금 호텔은 신규 인력을 뽑지 않고 있으며, 셰프 포지션의 T.O도 이미 꽉 찬 상태라는 것이다.
자리가 생기면 1순위로 연락해 주겠다는 말에, 내 안의 희망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자리가 생길 때까지… 몇 개월? 몇 년? 그걸 어떻게 기다려?’

나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내려놓고, 거의 울먹이며 셰프에게 부탁했다.

“셰프, 저는 지금 경력이 가장 중요해요. 영주권을 위해 2년 경력을 채워야 해요.
비자는 이제 딱 2년 남았고, 지금 바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일 할 기회를 주세요.. 그냥 여기서 계속 일하면서 경력만이라도 쌓게 해 주세요. 제발요… 부탁드립니다.”

셰프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러더니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무급으로 일하는 건 가능하지만, 문제는 보험이야.”

호주에서는 직원이 다쳤을 경우를 대비해, 직장에서 근로자 보험을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데
무급 직원은 그 보험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내가 칼에 크게 베이거나, 화상을 입는 일이 생기면 호텔은 물론 정부까지 법적 문제에 휘말릴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실습생 시절엔 학교 측에서 보험까지 책임져줘서, 마음 놓고 현장 경험에 몰입할 수 있었다.)

‘현장 실습이 이제 1주일도 안 남았는데, 그 사이에 영주권법이 바뀌고, 지금 당장 취업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현실은 너무도 잔인했다.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다.
머릿속은 하얘지고, 뭔가를 생각해보려 해도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심장은 두근거리는 게 아니라,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피가 도는 것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도착했다.
그날따라 아내는 저녁을 차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자기야, 오늘 어땠어? 셰프랑 얘기 잘 됐어?"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웃어주고 싶었지만, 입꼬리는커녕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억지로 고개만 끄덕인 채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화장실 문까지 다시 잠갔다.

그 순간,
참아왔던 모든 감정이 무너졌다.
배수구에 웅크리고 앉아,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엉엉 울었다.
소리가 새어나갈까, 아내가 들을까 두려워 입을 틀어막은 손은 점점 떨리고,
눈물은 마치 멈출 줄 모르는 폭우처럼 쏟아졌다.

이 모든 게 한순간에 무너졌다.
수백 시간의 실습, 새벽마다 일어나던 훈련, 언어장벽을 깨기 위해 피 토하듯 공부했던 시간들…
그 모든 게 지금, 단 한 줄의 법 개정 앞에서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졌다.

'이럴 거면… 왜 이렇게까지 했던 거지?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그날 밤, 나는 세상에서 가장 깊은 어둠 속에 홀로 던져진 기분이었다.
눈물에 얼굴이 다 젖은 줄도 모르고, 바닥에 웅크린 채 끝도 없는 절망 속에서 조용히, 그리고 깊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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