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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블랙아웃의 밤"

by 호주아재

사실은, 셰프에게 말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울고 싶었다.
‘돈은 필요 없다’니… 내가 그런 말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현실은, 당장 다음 주 렌트비, 다음 달 카드값이 걱정이었고, 냉장고 속 재료를 아껴 써야만 했다.
식비, 생활비, 교통비, 휴대폰 요금… 모든 걸 계산기에 두드려 가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애원해서라도 기회를 잡아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정말로 모든 게 끝날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자존심도 체면도 다 내려놓고 셰프 앞에서 간절히 말했던 거였다.

‘돈은 필요 없습니다. 제발, 일할 기회를 주세요.’
그 말이 입에서 나왔을 때, 마음 한구석이 무너져 내렸다.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걸… 나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라도 해야만 했다.
살아남기 위해선 자존심 따윈 사치였다.




그날 저녁.
평소보다 더 말없이 거실에 앉아 있던 내게,
동생들과 함께 저녁을 준비하던 아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기야… 무슨 일 있었어?”

나는 대답 대신, 힘겹게 웃으며 말했다.
“나 오늘 저녁에… 술 좀 마셔도 될까?”

그 말을 듣자, 먼저 반응한 건 동생들이었다.
술을 좋아하고 천진난만한 지니는 눈을 반짝이며
“오빠, 오늘 술 마시자고?

와우! 맛있겠다!”라며 신나게 웃었다.
늘 분위기 메이커였던 그녀는, 잠깐이라도 나를 웃게 해주고 싶었던 걸까?.

그런데 에이미는 달랐다.
정이 많고 신중한 그녀는 잠시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갑자기? 오빠, 무슨 일 있어?”

그 말에…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불안이, 순간 들켜버린 것 같았다.
에이미는 언제나 이렇게 예리했다.

그날따라, 그 좋아하던 소주 맛이 왜 그렇게 썼던지.
쓴 것도 모자라, 목을 넘길 때마다 속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저 웃는 척만 하며 잔을 들이켰다.
한 잔, 두 잔… 한 병, 두 병… 어느 순간,
블랙아웃.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밤늦도록 들이킨 술 사이로,
참아왔던 눈물까지 흘러내렸다.
술과 눈물이 뒤섞여, 나는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텅 빈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눈을 떴다.
몸은 차가운 바닥에 누워 있었고, 머리는 깨질 듯 지끈거렸다.
속은 뒤엉켜 있었고, 목은 바짝 말라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픈 건… 현실이었다.

일자리도, 영주권도, 돈도…
아무것도 손에 쥔 게 없었다.
그냥 숨만 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지…?’

그 생각에 깊은 공허가 밀려왔다.
텅 빈 집,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만 홀로 동동 떠 있는 기분이었다.
가족도 있었고, 웃음도 있었는데… 정작 나는 어디에도 없었다.
마치, 세상에서 내가 투명해진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누워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몸은 무겁고 기운은 없었지만… 더는 이대로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내 질질 끌리듯 욕실로 향했다.

그곳엔, 어제의 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욕실 거울 앞에 섰다.
퉁퉁 부은 얼굴, 퀭한 눈, 지친 표정.
그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입술을 꽉 깨물며 나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이대로 포기하면 끝이다.
웃기지 마.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무조건 이겨낸다. 어떻게든 살아남는다.

갈 때까지 가본다.”

그 다짐은, 절망 위에 겨우 쌓아 올린 외침이었다.
텅 빈 손바닥을 바라보며 깨달았다.
내가 가진 건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너질 수도 없었다.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나는, 다시 싸울 준비를 시작했다.

그리고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릴 때, 마치 어제의 나를 씻어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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