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나는 이민 법무사를 찾았고, 그동안의 사건들을 토대로 영주권의 자격 조건을 갖추기 위한 상담을 받았다.
"민호 씨! 경력을 갖추는 건 좋은데, 호주 이민성은 페이슬립(월급 명세서)처럼 내가 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일을 몇 시간 했는지를 요구하는 거예요! 이걸 어떻게 증명하시려고 해요?"
헐!!!... 잠시였지만, 신혼여행 비행기에서 아내에게 찔렸던 그 심장, 그 기분이 또다시 살아났다.
이번엔 아내 대신 이민성이 내 심장을 더 깊숙이, 더 깊게 찌른 것이었다.
"법무사님, 그럼 취업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건가요?"
"될 수 있으면 금액이 적더라도 빨리 취업 자리를 알아보시는 게......"
나는 바로 법무사님의 말을 끊고 이렇게 물었다.
"그럼 혹시 제가 로그북을 만들어서 매일매일 확인 사인을 받으면 어떨까요? 현장 실습 때 실습일지에 확인 사인을 받았던 것처럼요."
절망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몸부림 속에서, 왜 그런 생각이 갑자기 떠올랐는지 나조차도 의아했다.
법무사님도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현재 이민성에서 요구하는 조건이 2년 경력에 대한 사항만 추가적으로 바뀐 상태니까, 굳이 페이가 없더라도 경력이 증명만 된다면?.... 제 생각으로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일단 민호 씨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 해보는 게 좋겠죠? 설령 안 되더라도 후회 없이 해봐야 되는 거잖아요? 민호 씨도 그런 걸 원하는 거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저도 끝까지 해보고 싶어요."
법무사님과의 상담이 끝나고 사무실을 나오는 길.
머릿속은 이미 풀가동되고 있었다.
"그래, 이제부터는 하나하나 기록해야 한다."
"증명할 수 있는 건 모두 남겨야 한다."
하지만 막상 '로그북'이라고 하니까 뭘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왔다.
"매일 뭐 했는지 적는 건 기본이고, 가능한 한 자세히, 최대한 그럴듯하게... 사진도 찍어야 하나? 아니, 동영상도 찍을까? 출근할 때마다 인증샷? 아니야, 그러다 이상한 사람 될 수도 있어..."
나 혼자 중얼거리며 걷다가, 급기야 휴대폰 메모장에 적기 시작했다.
•출근/퇴근 시간 기록
•오늘 한 일 상세하게 메모
•함께 일한 동료 이름 기록
•가능한 사진 자료 첨부
•작업 내용 간단 요약
결국 나는 마음속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래, 민호야. 지금부터 네 삶은 다큐멘터리다."
이렇게 해서, 내 인생 최초의 로그북 프로젝트, "민호, 경력 만들기 대작전"
이 은밀하고 조용하게 시작되었다.
그날로 바로, 페이슬립을 대신할 수 있는 로그북을 만들었다.
매일 일이 끝난 후, 몇 시간 동안 무슨 일을 했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함께 일한 셰프들에게 사인을 받아
영주권 신청 시 제출할 증빙 자료로 하나하나 모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로그북을 채우는 과정도 만만치 않았다. 매일 사인을 받아야 하니, 선배 셰프들에게 아부도 좀 해야 했고, 급기야 "셰프, 사인 한 번만!"이라며 커피를 사서 들고 다니는 나를 본 알피가 "이안, 너 뭐 하냐? 여기서 팬미팅이라도 하는 거야?" "그 커피 나한테 몰아주면 내가 매일 두장씩 사인해 줄게"라고 놀리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셰프는 "이안은 내 팬클럽 골드 회원이야!!"라며 깐족대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한술 더 떠서 “셰프, 내가 팬클럽 1기 회원이니까 사인 열 장 받으면 골드 회원 말고 플레티넘 멤버로 업그레이드해 줘요.”라고 받아쳤다. 그러자 주방이 웃음바다가 됐고, 나의 로그북은 열 장... 스무 장... 점점 두꺼워져 갔다.
그렇게 나는 로그북과 함께 하루하루를 버텨 나갔다. 과연 이 작전이 성공할지, 이민성의 벽을 넘을 수 있을지,
나의 영주권 도전기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