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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현장실습 후유증-기획된 체력 방전 프로젝트"

by 호주아재

현장 실습 이후, 내 일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니, ‘바뀌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삶 전체가 리셋된 느낌이었다.

마치 로그아웃했다가 낯선 계정으로 다시 접속된 기분.

그 계정 속 나는, 체력도 정신도 한계에 다다른 초보 요리학도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내 하루는 이렇게 흘렀다.


오전 6시 – 기상

기상이라 쓰지만, 사실은 ‘기절에서 깨어남’에 가까웠다.

눈을 뜨는 매 순간이 기적처럼 느껴졌다.

잠들 땐 오늘 하루를 살아낸 게 대견했고,

다시 깨어날 땐 또 하루를 버텨야 한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


오전 8시 – 학교 이론 수업

실습이 있는 날엔 새벽 5시 30분까지 등교해야 했다.

새벽 4시 30분쯤 집을 나서면

어두컴컴한 거리엔 사람도 거의 없고,

달빛만 멀뚱히 나를 비추고 있었고,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걸까,

누구를 위해 이 새벽을 견디고 있는 걸까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오후 3시 – 수업 종료 후 호텔로 이동

25분 거리의 호텔까지 걷는 길,

가끔은 중간에 멈춰 벤치에 눕고 싶었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더 무거웠다.

하지만 멈추는 순간, 그날의 일정이 무너진다. 그래서 멈출 수 없었다.


오후 4시 – 호텔 주방 실습 시작

나는 항상 20분 먼저 도착했다.

누군가는 열정 때문이라 생각했겠지만,

그냥 '지각 공포증'에 시달리는 근면한 한국인의 본능?


사실은 몸에 밴 습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는 그저 지각하지 않기 위해,

기회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렇게 움직였다.


밤 10시 – 실습 종료

긴 하루를 마치고 “이제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 법도 하지만, 사실 진짜는 지금부터였다.

몸은 이미 지쳤지만, 머리는 다시 책상으로 향해야 했다.


밤 11시 – 공부 시작

배를 간단히 채우고 나면,

요리책을 펼치고 다시 영어 단어와 조리법을 외운다. 단순한 암기가 아니다.

못 알아들으면 혼나고, 실수하면 위험하다.

그러니 무조건 외워야 했다.

500가지가 넘는 식재료, 수백 개의 조리도구와 테크닉. 누구는 그냥 단어라 했지만 나에게는 생존을 위한 언어였다.



새벽 2시 – 취침

이 시간엔 눈을 감는다는 표현보다

의식이 꺼진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내 몸은 으깨어진 매쉬드 포테이토처럼 침대와 하나가 되어 있었다.


토요일 & 일요일 – 자칭 ‘휴일’

형식적으로는 쉬는 날이지만,

실제로는 도서관에 출근하는 날.

밀린 과제, 또 공부, 또 요리책.

그마저도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엔 여전히 수셰프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Ian, 집중해. 더 정확하게.”

그 말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조리법을 상상하며 복습했다.




이 지독한 루틴을 1년 넘게 반복했다.

몸이 망가지는 줄도 몰랐다.

늘 긴장한 상태로 살다 보니,

내가 피곤한 건지, 아니면

삶이 원래 이런 건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그땐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데 급급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모든 ‘무모함’은 내 열정의 증거였다.


쓰러질 듯 버티고, 울컥해도 다시 일어나고,

칼 대신 눈물로 버무리던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도 주방 한복판에서 조금 더 단단하게, 조금 더 뜨겁게 요리를 하고 있다.


그 시절의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지금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누군가에게도...


“그 고된 하루들, 결코 헛되지 않아.

언젠가는 그 시간을

가장 자랑스럽게 꺼내게 될 날이 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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