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드라마에 신파가 빠지지 않는 것은 그만큼 인간관계가 거칠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추석에 가족이 체험을 왔다.
외할머니, 엄마, 아빠, 처제, 아이가 체험을 했다.
즐겁고 편안해 보였다.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별거 아닌 일도 위로하고 놀리기도 한다.
늘 즐겁겠구나
힘이 되겠구나
보고 있는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어머니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 갔다 오시다가 어지러워서 길에 쓰러지셨고 누가 119 불러 준다는 걸 구급차 비용이 드니까.
그냥 괜찮다 하고 한참을 길가에 앉아 있다가 겨우 기운 차려 집에 왔다고 하신다.
가끔 저혈당으로 길에 쓰러지신다.
남의 행복을 내 것인 냥 착각했다.
어머니 얘기 들으며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 얘기를 형에게 하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어떤 상황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형에게 말하라고
형들에게 현실을 깨닭게 해주라고
늦은 오후
가을 햇빛이 공방 깊숙이 들어왔다.
부를 대물림하는 것처럼 가난도 대물림이 된다.
대물림하지 않으려면 선택을 해야 한다.
어머니는 나를 선택했다.
6살 때 아버지 사업이 망했고
서울 큰 아버지댁에서 2년을 살다가
학교를 가야 해서 8살에 원주로 돌아왔다.
7년의 삶 중 2년을 다른 사람들과 살았고
다시 만난 가족은 낯설었다.
첫 만남이 어설프게 기억난다.
겨울이었고
안방이었다.
옛날 집이라 방 안이라고 해도 따듯하지는 않았다.
키가 작은 나는 모든 것을 올려다봐야 했다.
천장의 어두 컴컴한 형광등.
나전칠기로 꾸며진 옛날 장롱.
장롱 위의 뭔가를 꺼내 환영 선물로 줬던 기억이 있으나
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형광등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하셨다
내가 잠든 후에 들어오시고
내가 학교 갈 땐 주무시고 계셨다.
아버지는 안방에서 신문만 보셨다.
성인이 될 때까지 그렇게 살았다.
서로 간섭하지 않고 살았다.
그래도 대학은 갔다.
in seoul은 못 하고
그냥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학교로 갔다.
형들은 80년대 호황기에 대기업에 취업하여 서울에 살고 있었다.
나는 고향에 있었으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는 내 몫이었다.
어머니 장사를 도와야 했고
번갈아 입원하시는 부모님을 책임져야 했다.
병원비는 아니더라도 간병은 내 몫이었다.
집안 형편도 그래서
1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다.
재대 후 아버지는 위암으로 수술을 받으셨고
내가 졸업할 때까지 3년 동안 항암 치료받으시다가 돌아가셨다.
졸업 후 서울로 취업을 했다.
도망가지 않으면 평생 내 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방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서울에 대한 동경도 조금씩은 있다.
어머니는 혼자 장사를 할 수 없었기에 나의 상경에 맞춰 가게를 접으셨다.
형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서울에 있지만
혼자 계신 어머니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나에게 있었다.
명절이 아니면 내려오질 않았다.
입원하시고 수술하실 때마다 나에게 연락을 하셨다.
사기를 당해서 평생 모은 돈을 날리셔도 나에게 만 얘기를 하셨다.
이사를 가야 하는데 전세금이 부족하다고.
형들에게는 얘기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혼자서 해결했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혼자 해결할 수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하는 건 옳지 않다.
어머니는 형들에게 가난을 물려줄 수 없었다.
그런 형들은 40대 중반을 넘기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첫째는 사업을 시작했고 망했다. 그리고 연락을 끊었다.
둘째는 이민을 갔고 가끔 통화가 이루어지는 것 같고 생활비 20만 원을 보내주는 것 같다.
아버지 묘소 문제 이후 나도 어머니와 거리 두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살고 싶은 사람하고 살라고 했지만
혼자 사시겠다고 한다.
그건 말이 안 되고 형들 중에 선택하시라고 해도
혼자 사시겠다고 한다.
저렇게 까지 형들이 소중하다.
부모가 자식을 편애하면 형제간의 우애는 없다.
드라마의 신파는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텐데.
연인이나 부모, 반려 동물과의 헤어짐 이런 것들 보다
버려지거나 방치된 아이들이 나의 신파 버튼이다.
즐거운 가족이 만들어 놓은 도자기를 다듬어 정리하고
지저분해진 자리와 바닥을 청소했다.
이제 혼자서 떠안지 않겠다고
매정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