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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키포키 Feb 13. 2024

프리지어 꽃향기를 내게 안겨준 사람

내일은 밸런타인데이다. 사랑을 대놓고 표현하라 하는 날에 내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 지나간다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굳건하고 위대한 사랑은 아니기 때문에 남들처럼 무언가를 남편에게 사다 주고 싶었다. 초콜릿이 든 간식과 꽃을 사주자. 집 앞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초콜릿이 든 디저트를 샀다. 원래 계획은 마카다미아가 든 초콜릿 타르트를 사는 것이었는데 이미 다 팔려서 쇼케이스에는 하트 모양의 초콜릿 다쿠아즈와 초콜릿 조각케이크만 남아 있었다. 남편은 요즘 건강을 위해 되도록 저녁을 굶고 있으므로 다쿠아즈 하나만 사도 충분했을 것이다. 초콜릿케이크를 좋아하지도 않는 남편이지만 계획실패한 초콜릿타르트의 맛에 상응하려면 케이크까지 같이 사야만 했다.  


케이크를 사들고 근처 꽃집을 찾아다녔다. 늘 가던 가게는 이제 행사용 꽃장식을 만드느라 바쁘니 꽃다발을 살 거라면 전날 미리 전화를 해서 예약을 하라고 그런다. 꽃다발을 사고 싶은 마음과 책을 사고 싶은 마음은 도저히 미리 계획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건 나에게는 오지 말라는 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동네에 많았던 꽃집들이 죄 사라져서 근처에는 이제 꽃집이 두 군데밖에 남지 않았다. 한 군데는 미리 만들어 놓은 꽃다발을 파는 곳인데 창문 너머로 가게 안을 보니 내가 사고 싶은 꽃이 없었다.


지난 휴일에 남편과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테이블의 화병에 꽂힌 꽃냄새를 맡았다. 남편은 꽃냄새를 왜 맡냐 하더니 맡아보라니까 또 순순히 냄새를 맡았다. 프리지어 냄새가 제일 좋고 그다음은 국화꽃이랬다. 장미에서는 지린내가 난다고 그랬다. 그게 바로 싱싱한 장미꽃향기라는 거야. 남편은 내가 좋아하는 향기를 별로 안 좋아한다. 난 백화점 1층 냄새도 좋아하고 올리브영 냄새도 좋아한다. 남편은 그런 곳에 가면 코가 아프다고 그런다.


프리지어 냄새가 좋댔으니 프리지어 꽃을 사주어야지. 남편에게 해바라기를 몇 번 선물했었다. 남편은 노란 꽃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로구나.


프리지어를 사려면 그 가게에 가야 한다. 그 가게는 항상 생화가 많기 때문에 프리지어 정도는 있을 것이다. 꽃집과 카페를 겸하고 있지만 커피를 마실만한 테이블은 마른 꽃과 잡동사니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사방 벽에 기독교 문구를 써붙여놨다. 한 번 집에서 가깝다고 남편이 거기서 꽃다발을 사 왔는데 꽃을 조합하는 솜씨가 별로였다. 꽃다발을 만든 사람이 아무래도 총천연색의 화면조정컬러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걷다가 가게 바깥에 놓아둔 화분들이 좋아 보이길래 한번 물어보러 들어간 적 있다. 겐차야자가 있냐고 물어보니 대뜸 어차피 자취방도 좁은데 그런 큰 것은 자리 차지하니까 테이블 야자를 사라고 그랬다. 우리 집에 언제 와봤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난 거기서 민망해서 저 결혼했거든요! 하고 대뜸 버럭 했다. 결혼했으면 집이 넓다는 소린가. 결혼해도 집이 좁을 수도 있잖아. 설령 좁은 집에 자취를 한다 해도 겐차야자가 키우고 싶다면 키워도 되는 거잖아. 결국 그 후에 친구가 테이블 야자 화분을 주었기 때문에 겐차야자를 사지는 못했다. 실제로 우리 집은 겐차 야자를 둘 자리가 없는 정도로 좁은 것이다. 그래서 이 후로 그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나의 열등감에 대해 생각했다.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목표가 확실하니 괜찮지 않을까.


-프리지어 꽃 얼마예요?

-두단 주세요.

-화병에 꽂을 것이니 짧게 잘라주세요.

-선물할 것이니 겉을 한 번만 싸주세요.

-포장지는 저기 글씨가 쓰인 종이로.


주인은 안개꽃을 서비스로 주겠다고 그랬다. 뭐야 친절하고 괜찮은 곳이었네? 꽃다발도 내가 원하는 느낌이 나서 좋은데? 하고 만들어지는 꽃다발을 바라보고 있는데 주인이


-여자친구한테 선물하려고?

라고 물었다.


-남자친구한테 줄 거거든요!


남자 주기에도 괜찮지 하고 중얼거리며 주인이 꽃다발을 다듬었다.


나는 도대체 밸런타인데이에 여자친구에게 프리지어 꽃다발을 선물하는 여자를 뭐라고 생각하길래 당황해서 남편을 남자친구라고까지 불러버린 것인가. 여자친구에게 꽃다발을 준다 해도 다를 바가 없는 상황인데. 내가 남자를 싫어하는 건 도대체 어떻게 안 거지? 그러고도 나는 남편을 몹시 사랑하는 양가감정을 품고 있으며…. 그리고 나는 집으로 걸어오며 작은 자취방에 커다란 겐차야자를 키우며 프리지어 꽃다발을 사서 여자친구를 기쁘게 해주고 싶어 하는 어떤 여자를 상상해 보았다. 그 여자는 아마도 아주 잘 살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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