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조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키포키 Jan 01. 2024

개똥 같은 새해


멀리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있다. 누군가 오늘 아침 저기까지 올라가서 신년의 해 뜨는 사진을 찍어 보냈다. 공원은 눈이 녹아 진흙투성이였다. 축축하고 미끄러운 길을 빠르게 달리는 사람들이 있었고 나는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었다.


개들을 보았다. 엉덩이에 털이 풍성하게 난 흰 개, 유모차에 탄 작은 까만 개, 개 놀이터에 가만히 서서 핸드폰을 만지는 주인 옆을 서성이는 늙은 갈색 개. 동물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새해가 오기 전에 슈테파니 슈탈의 <내 안의 그림자 아이>를 읽었다. 책에는 연약한 자아를 인식하기 위한 몇 가지 예제가 있었다. 혼자 그것들을 해보려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누군가 있으면 좋을 텐데, 과거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안전장치가 되어 줄 인도자가 있으면 좋을 텐데.


인터넷 창에 <그림자 아이>, <집단 상담> 따위를 검색해 보았다. 그림자 아이를 다루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단체의 리더는 목사였다. 거기서 교육비를 내고 교육을 받으면 그림자 아이 치료를 할 수 있는 자격증을 주고…. 누구라도 좋으니 믿고 의지할 정도의 상태는 아니다. 인터넷 창을 금방 닫았다.


과거에 들었던 말, 스스로에 대한 판단, 그에 대한 감정을 써 보았다.


‘나는 방해되는 존재야’

‘나는 필요 없는 존재야 ‘

‘나는 아파도 참아야 해’


어린 나의 생각은 나이 든 나조차 외롭고 슬프게 만든다.


나는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평생 애썼다. 나는 필요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 마음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려 노력했다. 나는 아픈 것을 오랫동안 참는 바람에 크게 아팠다. 올해는 방해되고 필요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에 들기 위해 이상하게 구는 것은 좀 그만두고 싶다.


돌아오는 길에 밟아서 뭉그러진 개똥들을 보았다. 1월 1일이라고 모든 것이 사라지고 아름답고 깨끗하게 새로울 수는 없다. 12월 31일에 개 똥구멍을 막을 수도 없는 일이다. 개똥은 누가 밟았을까. 눈 속에 파묻혀 밟았는지조차 몰랐을 수도 있지. 아무런 쓸모도 없고 밟으면 기분이 나빠지는 개똥. 그리고 그걸 싸재낀 존재만으로도 사랑스러운 귀엽고 착한 개들.


편의점에서 바나나 우유를 하나 사고 택배를 찾으며 점원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했다. 그 사람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더니 내 뒤통수에 대고 큰 목소리로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했다. 나를 위해서 인사했는데 그 사람도 우연히 기뻐 보이는 것이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꿀벌은 일찍 죽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