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양봉 수업을 들은 이후로 내 관심은 온통 양봉에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면 양봉이, 벌이 왜 좋은지 이야기하게 된다. 왜 벌이 좋은가요? 벌은 생애 전 구간 내내 오로지 자기 할 일에 최선을 다한다. 공동체를 자기 자신으로 생각하는 초개체다. 그래서 완벽한 공동체를 이룬다. 공동체에 해가 되는 개체에는 가차 없다.
거기서 내 말을 듣던 사람들의 표정이 종종 굳어진다. 나를 나치즘에 빠진 우생학자 정도로 보는 시선이다.
“그럼 약자는 공동체에서 사라져야 하는 거야?”
만일 그것을 인간으로 치환한다면 공동체에서 내쫓아야 할 것은 약자가 아니라 약자는 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기적인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이기적인 사람들은 결코 강하지 않다. 자기의 연약함이 들통날까 봐 두려워서 자기의 관점에서 더 연약한 이들을 찾아내서 내쫓고 싶어 하며 스스로 벼랑을 향해 뒷걸음치는 이들이다.
생은 약육강식이라 하지만 약한 것을 돕고 살리느라 인간이 이룬 진화의 업적이 월등히 많다고 생각한다. 동물은 약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하지만 동물이 약한 이들과 함께 생존할 방법을 안다면 반드시 함께 생존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다. 거기 선하고 악함은 없다. 돌봄은 개체를 더 강하게 만드는 길이기 때문에 그리하리라 생각한다.
한 지인은 벌의 생애주기가 얼마나 되느냐고 물어보았다. 봄부터 여름까지 꿀을 열심히 모으는 일벌은 3개월가량 생존하고 가을부터 초봄까지 겨울을 나는 월동벌은 6개월가량 산다. 그 지인은 듣고서 “인간이 너무 오래 사네요.”라고 말했다.
아!
하루 살듯 살기란 아주 행복하다. 오늘 만나는 사람들은 정말 오늘 하루에만 있기 때문에 그들을 벌이 열심히 수집하는 꿀처럼 대하게 된다. 만일 내년을, 10년 후를, 노후를 꿈꾼다면 나는 두려울 것이다. 잃어버릴 것들로 겁날 것이다. 미래의 나를 지키기 위해 지금부터 많은 것들을 수집할 것이다. 젊은 나는 생존할지도 미지수인 늙고 아픈 나를 돌보기 위한 것들에 벌써부터 짓눌려 살아야 할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믿음의 문제 같기도 하다. 벌은 집단과 자신을 분간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 할 일을 열심히 한다. 얼마 살지 못하는 일벌이 목숨을 깎아 온종일 수집한 꿀로 어린 벌들은 자란다. 나는 어린이에게서도 나를 보고 나이 든 이에게서도 나를 본다. 운 좋게도 많은 이들이 내가 그들에게 친절한 것보다 나에게 훨씬 친절했다.
지난 수영장 수강 신청을 하던 날에 내 옆에 서 있던 두 노년의 여성이 대화했다.
“왜 지난달에는 수영장에 나오지 않았어?”
“나 그때 많이 아팠어. 왠지 죽을 것 같더라고”
“그러면 안 돼. 죽어도 수영하다가 죽어!”
수영장의 아줌마들은 선하고 악하다. 어른스럽고 유치하다. 지저분하고 깨끗하다. 웃기고 지루하다. 나는 그들을 자세히 바라보게 되고 대부분 멋지고 사랑스럽다고 느낀다. 아직 젊은 타인의 오만일 것이다. 내 바로 옆에 그만큼 나이 들어 본 사람이 없어서 그들의 명암에서 명을 주로 읽게 된다.
그저 그런 인간인 채로 닿는 만큼 살아보고 싶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르게 죽거나 스스로 생을 등졌다. 살아있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늘 떠나보내야 했다. 그들은 이전에는 이 세상에 실존했고 지금은 내 마음에 놓인 각각의 방에 문을 닫고 앉아서 영원히 머무는 것처럼 느껴진다. 내가 원할 때 그들과 만날 수 있고 때로는 원하지 않는 때에 나타나서 그들을 정말로 상실했던, 그 원하지 않았던 순간의 고통을 생생하게 느끼게 한다. 거기 슬픔은 있어도 전만큼의 애통은 없다. 나 역시 죽음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갑자기 죽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끝까지 버텨보고 싶다. 그래서 아무도 나를 그리워하지 않고 오로지 후련해했으면 좋겠다. 지긋지긋하게도 오래 살았군! 하면서. 이런 소리 하다가 오늘 차에 치여 죽는다 해도. 그건 어쩔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