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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에서 첫 5km 마라톤 완주기

스페인어 잘못 알아듣고 그냥 갈뻔했지

by 초록초록

스페인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고

참가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게 있다면

바로 5km 마라톤 행사!


사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대회는 아니고

골프 클럽에서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이벤트였는데

골프 클럽 회원으로 계신 분이 회원당 2명이 참가할 수 있다며 혹시 나갈 의향이 있냐고 물어보셨다.


코스는 5km, 10km 두 가지이고

골프장 한 바퀴를 돌면 5km, 두 바퀴를 돌면 10km란다.


학창 시절 장거리 달리기는 늘 1등이어서 자신도 있었고

골프장 안을 뛴다는 것도 색다르게 느껴졌던 데다

지금 아니면 언제 해보겠다 싶어 바로 해보겠다고 했다


그렇지만 그때는 꾸준히 달리기 연습을 하던 게 아니었으니 가볍게(?) 5km를 뛰겠다고 했다


운동삼아 하루 30~40분씩 동네를 뛰기는 했지만

이렇게 특정 거리를 뛴 적은 한 번도 없었어서

5km가 어느 정도인지 감이 전혀 없었다.


드디어 대회 당일!


7시부터 시작이고 골프장이 집 근처여서

평소와 다름없이 6시까지 일하고 애들 저녁 차려주고 골프장으로 향했다.


이미 많은 사람이 공식 티셔츠를 입고 준비 운동을 하거나 사진을 찍고 있었다.

작은 행사인 줄 알았는데 기념품도 나누어주었고

포토존과 진행자까지 있었다.

역시 스페인은 행사에 진심인 나라였다.


7시 정각!

사회자 카운트 다운에 맞춰 우르르 출발했다.

대부분 골프장 회원이니 코스가 익숙했겠지만

나는 코스를 전혀 몰라서 앞사람만 보고 뛰었다.

중간중간 구름과 석양이 너무 예뻐서 사진도 찍으면서.

너무 예뻤던 하늘

연습 부족은 금세 탄로 났다.

기세로 뛰었던 초반 1~2킬로가 지나면서

숨이 턱턱 막히고 언제 5km 채우는지 미칠 것 같았다.


그나마 앞서 가는 사람이 보이거나 반환점을 돌아오는 사람이 보이면 힘을 내게 되기도 하는데


이 코스는 큰 골프장을 도는 형태라

사람들이 본인 속도에 따라 뿔뿔이 흩어져서

결국 내 주변에 보이는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페이스로 달리는 몇 명뿐이었고

그중 나와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여자분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꾸역꾸역 뛰다 걷다 했던 것 같다.


내가 장거리 달리기에서 늘 1등 한 전략은 딱 하나였다.

마지막까지 2~3등으로 달리다가

마지막 바퀴에 전력질주해서 역전하기


선두권에서 슬슬 체력을 모아두었다가

막판에 쏟아붓는 전략이 주효했다


이번에는 선두권이 아니긴 했지만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여자분은

꼭 이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식상하고 진부한 표현이지만

피니시 라인이 보이면서부터

젖 먹던 힘까지 다 해서 뛰었고 결과는 성공!!


피니시 라인 통과하는데 사회자가 뭐라 뭐라 말했고

언뜻 "tercera"라는 단어가 들렸던 것 같다.


3등이라는 뜻이었는데

그때 왜 13등(trece)라고 들었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해 보면 13등까지는 세고 있을 리도 없는데.

멀게만 보였던 피니시라인
그날의 기록 : 워치 끄는 것도 잊어서 5.12km로 되어있다

피니시라인에 준비된 간식과 음료수를 좀 챙겨 먹고는

목표를 달성한데 만족하며 집으로 가려고 나섰다.


그런데 어떤 여자분이 다가와서

"너 3등인데 왜 시상식 안 가고 집에 가니?"라는 거다.

(내가 스페인어 못 알아들어서 그냥 가는 줄 알고 친절하게 영어로 알려줌)


그래서 "응? 나 13등 아니었어? 내 앞에 엄청 많은 사람들이 지나갔는데 내가 3등이라고?" 했더니


참가 분야가 거리별, 성별, 연령별로 나뉘어있는데

내가 참가한 분야에서 3등이라고 들었다면서

곧 시상식이 시작되니 얼른 가보라고 했다.


순간, 마지막 한 명 제친 게 이런 큰 차이로 이어지는구나, 역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하는구나 싶었다는.


얼른 시상식 장소로 가보니

1~3등 시상대와 트로피가 예쁘게 준비되어 있었고

사람들은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록 나만 혼자였고

나만 골프클럽 회원이 아닌 데다

나만 외국인이었지만

트로피는 받아가야지 하고 뻘쭘하게 기다렸다.


잠시 후 시상식이 시작되었고

정말 5km 여자부문 시상식에서 내 이름이 불렸다.

시상대에 올라가 예쁜 다람쥐 모양 트로피를 받았다.


센스 있게 내가 혼자 왔다는 눈치챈 분이

사진도 찍어주셔서 기념 사진도 남길 수 있었다.



나의 첫 마라톤은 이렇게 끝났다.

한국 와서 나간 3대 마라톤 10km 대회와 비교해 보면

이건 정식대회로 보기 어렵고 나도 뛰다걷다 했지만


역시 뭐든지 경험해 보고 도전해 보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었고

3등 트로피도 받았으니 정말 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 자신 정말 잘했다 잘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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