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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Feb 12. 2021

습관은 무서운 놈이다.

꼭 원하지도 않는 것만 몸에 밴다

습관이란 건 정말 무서운 놈이다.


나에게 좋은 습관은 거의 없다. 씻고 자는 것도 습관이 제대로 들지 않아 매번 노력해서 씻는다. '씻으면 잔다'는 공식을 왜 나는 여태 만들지 못해서 씻은 날을 기념해야 하는 건지. 남편도 매번 씻고 자란 말을 앵무새처럼 말하다 지쳐버렸다. 이제는 씻지 않은 날 땨가운 말을 하는 대신에 씻은 날 박수를 쳐주기로 한 것 같다. 그 편이 체력도 아끼고 서로의 기분도 상하지 않는 좋은 방법이라 생각한 듯 싶다. 박수를 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씻고 자기는 33년 째 1월 1일 새해목표가 됐다. 나는 매년 이번 해의 목표를 마음속으로 정하곤 하는데, 그 중 1번이 씻고 자기다. 샤워하고 자기도 아니다. 씻고 자는 거다. 일단 고양이 세수라도 하면 그건 씻은걸로 친다. 정말 더럽기 짝이 없는 말을 이 곳에 적고 있자니 내 스스로가 한심해지지만, 아무튼 좋은 습관이란 이렇게 만들기가 어렵다는 말을 쓰고 싶었다. (그냥 게으르다고 말을 하면 되잖아..)


그런데 정말 놀라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이건 브런치를 시작하면서 알게 된 습관이다. 글을 쓸 때 4000자를 채워서 쓰는 것이다. 이건 내가 노력해서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짧고 간결한 글을 쓰고 싶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글을 쓰고 싶다. 누군가는 그랬다.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퇴고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퇴고를 할 수록 글이 늘어난다. 지워! 지우란말야! 왜 자꾸 글자를 집어 넣는거야!


나는 다양한 글쓰기를 하곤 했다. 주로 기사를 썼지만 기사도 다양한 종류가 있어 여러 형식의 글을 쓸 기회가 많았다. 짧은 기삿글을 쓰기도 하고 인터뷰와 같이 길지만 핵심을 적어야 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경기를 미리 예측하는 프리뷰기사를 쓰기도 하고, 경기의 결과를 알리는 종합기사를 쓰기도 한다. 야구기사는 좀처럼 분량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쓰고 싶은 말을 대부분 다 쓰곤 했다. 그래서 형식에 얽매이지 않았다. 필요한 말이나 재미있는 내용은 그냥 대부분 썼다.


언젠가 대필기사 작성하는 일을 한 적이 있다. 그 기사를 쓸 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해서 전부 써서는 안 됐다. 이 글이야 말로 사람들이 많이 읽어야 했기 때문에 글의 분량과 단락이 중요했다. 쉽고 빠르게 정보를 캐치할 수 있도록 써야 했다. 너무 길어서도 안 되고 너무 짧아서도 안 된다. 적절한 글자수를 맞춰 읽다가 지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야구기사의 경우 그 경기나 팀에 대해 궁금해서 읽는 사람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조금 길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내용이 알차고 많을 수록 더 자세하게 읽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일반 기사는 달랐다.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읽혀지기 위해' 쓰는 글이기 떄문에 간결하고 임팩트가 있어야 했다. 10개월 정도 꾸준하게 이 일을 했다.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에 10개 내외의 기사를 썼으니 생각보다 많은 글을 썼다. 그 일을 하는 동안 내 글은 정말 간결했다. 짧고 간단했다. 기사가 아니라 다른 글을 쓸 때도 필요한 말만 쓰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그렇게 쓰였다. 당시 긴 글을 써야 하는 일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소논문이라든가 기말 레포트라든가, 그런 글들을 구성하는데  은근 애를 먹었다.


정 반대의 경우도 있다. 봄이가 10개월쯤 됐을 무렵이었다.

봄이가 태어난 뒤 신생아때부터 10개월정도까지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씻는 것은 고사하고 그야말로 시체처럼 살고 있었다. 그러다 10개월에 접어들자 봄이도 패턴이 생겼다. 어느정도 잠도 자고 규칙적으로 먹었다. 깨어 있는 시간도 비교적 예측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덕질을 즐긴다.  좋은 키보드 사 모으는 것도 내 덕질 중 하나다. 키보드가 좋으면 뭐든 쓰는 재미가 있다. 손은 두 갠데 키보드는 열개쯤 되는 것 같다. 그만 사라..


나는 조금 살만해졌다. 내가 조금 살만해지면 드는 생각이 있다. '일을 하고 싶다.'

누구나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 고군분투하겠지만, 나의 경우 내가 하는 일에서 내 자존감과 정체성을 찾곤 했다. 그리고 그건 글쓰기로 이어졌다. 어떻게든 일을 해서 '나는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고 싶었다. 아기를 키우는 동안에는 특히 더 그런 것 같다. 나라는 존재가 전혀 부각될만한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무렵 나는 더 일을 하고 싶었다.


이번에도 글 쓰는 일을 하게 됐다. 봄이를 재우고 새벽에 짬을 내서 일을 했다. 앞선 경우와는 정 반대로 이번에는 3000자에서 4000자 수준의 칼럼을 대필하는 일을 했다. 어느정도 정보를 받아 그 정보를 토대로 글을 구성하고 칼럼형식으로 작성하는 일이었다. 4000자는 A4용지 4장 수준의 글이다. 사실 내 기준에서 그렇게 짧은 글은 아니다. 큰 틀의 형식이 미리 정해지지 않으면 4000자를 채우기가 쉽지 않았다. 받은 정보를 토대로 이 글은 어느정도 수준으로 글을 쓸 수 있을지 가늠하고, 글밥이 어느정도 나오겠다 싶으면 서론을 짧게 쓰고 아니면 서론을 무슨 이야기 쓰듯이 아주 기이이일게 쓰곤 했다. 본문을 채우고 결론도 내멋대로 냈다. 그렇게 내 글은 4000자에 맞춰지고 있었다.


이 일은 봄이가 갑자기 성장을 하면서 패턴이 다 흐트러지던 20개월까지 하게 됐다. 이 때는 몰랐는데 아마 이즈음부터 봄이의 재접근기가 시작됐던 것 같다. 잘 자던 봄이 잠을 제대로 자지 않으면서 나는 글 쓸 시간을 잃었다. 그렇게 그 일을 그만두게 됐다. 일주일에 4~5개 정도의 글을 썼다. 그렇게 10개월을 보냈다. 짧은 시간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그정도로만 생각했다. 꽤 긴 시간 긴 글을 작성했구나.


그리고 브런치에 글을 쓰고나서야 알았다. 4000자라는 놈이 습관이구나. 원하지도 않는 습관이 내 손가락에 배어들었구나. 내 글이 정말 무지막지하게 길다는 걸 느낀다. 지금도 그렇다. 딱히 형식을 정한 것도 아닌데 뭔 글을 이렇게 길게 쓰고있지, 쓰면서도 생각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지금처럼 (눈물)


그래서 요즘 연습하고 있는 것이 바로 글을 2000자 내외로 쓰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이미 3000자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33년동안 씻는 습관을 만들려 해도 하나 만들어지지 않더니, 이상한 글밥 늘리는 습관은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만들어지는 건지. 브런치를 쓰면서 2000자 내외로 쓴 글이 딱 한개있다. 그것도 지우고 지워 2000자 수준으로 맞췄다.  나는 4000자 글을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이제 그만 써라. 이쯤 멈춰도 돼! 또 4000자 쓰게 생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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