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시절에는 요리라고는 라면밖에 끓일 줄 모르는 철부지 중 하나였다. 그마저도 냄비 꺼내는 게 귀찮아 컵라면을 먹곤 했다. 가끔은 물 올리는 것도 귀찮아 엄마에게 물좀 올려달라고 했다. 욕도 먹었다.
엄마는 내가 결혼을 하면서 식구들을 모조리 굶길까 걱정하셨다. 혹시나 시어머니께 이런 못난 모습을 들키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조금은 하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의외로 요리에 재미를 붙였다. 놀랍지만 내 취미는 베이킹이 되었고, 남편과 봄이 먹을 빵과 간식들을 언제나 내 손으로 만들고 있다. 물론 주기 위해 만든다기 보다는 만든 김에 준다는 게 맞겠다.
처녀시절에는 청이 뭔지도 몰랐다.
유리병을 사고 과일을 사서 일일이 소독하고 담가두고 선물하는 친구들을 보며 경이로움을 느꼈다.
저 귀찮은 일을 어떻게 하지? 그냥 사서 먹으면 될걸.
역시 그런 마음이 가장 컸다.
그래서 요즘은 친구들이 나를 보면 정말 많이 놀라곤 한다. 그 게으르고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 망고가? 청을 만든다고? 해가 뜨긴 떴냐고? 정신이 아픈건 아니냐고? 등의 입에 올리기도 뭣한 농담을 올리며 나를 놀리곤 했다. 하지만 나는 정말 그런 것들을 집에서 손수 만들어 가고 있다. 나도 놀랍다.
봄이 제법 크면서 치킨무가 모자르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나와 남편이 눈치싸움을 하며 치킨무를 치열하게 먹는데, 그 눈치싸움에 눈치도 없는 정봄이 꼈다. 정봄은 달달하고 새콤한 치킨무의 맛에 눈을 뜨고는 우리가 한 개 먹을 때 두개를 집어 먹었다.
말도 안 통하는 22개월 꼬꼬맹이에게 그만먹엇! 한개만 먹엇! 말 해봐야 하나 소용이 없다는 걸 우리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치킨무를 차마 두개 주문하지는 못했다. 혹시 봄이 안 먹을 수도 있으니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참으로 어리석고 쪼잔한 마음이다. 그래서 매번 치킨을 먹을 때는 치킨은 먹지도 않는 봄이 덕분에 치킨무가 모자랐다.
문득 그런 봄이의 오물거리는 입을 보면서 치킨무를 내가 담가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첨가물이 들어간 치킨무를 저렇게 한도 끝도 없이 먹이는 것보다야 내가 만들어서 먹이면 모자르지도 않고 우리도 마음껏 마음놓고 먹을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 치킨무를 만들 채료를 사왔다.
생각보다, 아니 상상 이상으로 쉬웠다. 무를 자르고 설탕과 식초, 소금, 물을 비율에 맞춰 끓인 뒤 병에 넣으면 끝이었다. 4일 정도를 냉장고에 넣고 기다린 뒤 숙성된 후에 먹으면 된다. 이렇게 쉬운데! 그 동안 만들 생각을 안 했네.
포인트는 물이 끓자 마자 무가 들어 있는 병 속에 부어야 한 다는 것이다. 그런 뒤 뚜껑을 닫고 그 병을 뒤집어 놓으면 그 속에 공기가 들어가지 않아 진공상태가 된다. 이렇게 보관을 하면 평소에 먹는 기간보다 더 오래 먹을 수 있다. 청과 여러 번의 보늬밤을 만들며 배운 팁이다.
이 때 조심해야 할 게 있다. 바로 뚜껑을 똑바로 잘 닫는 것이다.
돌려서 닫는 뚜껑은 의외로 잘 맞물리지 않는 경우가 더러 있다. 특히 내가 구매한 것과 같이 예쁜 병의 경우 뚜껑이 기능에 충실하기 보다는 미적감각에 더 치중되어 있어 쉽게 어긋나고 잘 여닫히지 않는다.
나는 빠르게 이 일을 끝내고 싶어서 뚜껑을 빠르게 닫았다.
그리고는 뒤집었다.
뒤집기와 동시에 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아..또 뚜껑이 잘 안 닫혔나보네. 괜히 뒤집었다."
이렇게 말을 하고는 스스로 갸우뚱했다.
괜히 뒤집은게 아니라 왜 뚜껑을 대충닫았지!? 라고 말을 해야지!
사실 그런 병들, 이를테면 설탕을 담은 병이나 소금을 담은 병과 같이 각종 양념을 담아둔 병들은 좀처럼 뒤집어질 일이 없다. 바닥이 넓어서 넘어지기도 어렵다. 넘어지기 쉬운 긴 재질의 병이라면 대개 뚜껑의 형태가 돌리는 것이기 보다는 위로 열고 아래로 닫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설탕이나 소금통의 경우 급하게 사용하고 대충 뚜껑을 올려놓거나 잠그다가 마는 경우도 많다. 혹은 나처럼 엉망으로 맞물린 상태에서 돌려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병들은 좀처럼 넘어질 일이 없으니 뚜껑이 잘못 닫혔는지, 열렸는지, 뚜껑만 대충 올려놓은 건지 알 길이 없다. 다시 쓰기 위해 뚜껑을 열기까지는 대개 잘 모른다.
그래서 어떤 이유로 엎어지고 나면 나처럼 물이 새거나 소금이 쏟아지거나 설탕이 사방군데로 튀거나 하게 된다. 귀찮아서 대충 닫은 게 곱절은 더 귀찮은 일을 만드는 것이다. 짜증이 솟는 것은 덤에 덤이다.
흐른 물을 행주로 닦아내고 다시 원래대로 병을 돌려 놓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뚜껑을 잘 닫으면 뒤집어도 전혀 문제가 없었을 텐데, 뒤집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하는 나는 여전히 게으르구나.
무엇을 하면서 항상 나중을 말하는 나는 이런 일처럼 당장 문제가 생기는 일들을 피하곤 한다. 꼼꼼하지 않고 샅샅이 일을 하는 것에 굉장히 취약해서 나중에 한 번 더 봐야지, 나중에 더 완벽하게 바꿔야지, 라며 일을 더 키울 때도 많이 있었다. 나중과 나중들이 모여 대개 왕 나중이 형성되어 손을 대지 못해 그대로 끝나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왜 치킨무를 만들고 병을 뒤집다 이런 생각에까지 이르렀는지 참 웃기는 생각이지만.. 그냥 처음부터 뚜껑을 잘 닫으면 뒤집어지든, 넘어지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으면 가만히 서 있을 때는 몰라도 막상 넘어지거나 조금만 움직이더라도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우리네 인생도 비슷 한 것 같다. 겉으로 보기에는 뚜껑이 잘 닫힌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제대로 엇물리지 않아 틈새가 있어 물이 샐 수도 있고, 혹은 제대로 닫다 말아서 흔들리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 병은 넘어지거나 부딪히면 반드시 탈이 난다. 밑이 넓적한 병이라고 해서 꼭 넘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청이나 치킨무처럼 진공상태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뒤접어야 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넘어져도 뒤집어져도 아무런 탈이 없도록 처음부터 뚜껑을 잘 잠궈야 겠다. 내 마음속의 기쁨도 슬픔도 짜릿함도 서글픔도, 그 어떤 감정도 풍파를 만나 새어나가지 못하게 그리고 굳건하게 진공상태를 지켜내는 그런 튼튼한 유리병이 되어야겠다고 행주로 물을 닦아내며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