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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Mar 06. 2021

티비에서나 볼 줄 알았지, 드러누운 아이 말야

네가 바닥에 드러누울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아기를 가지면서 정말 많은 육아서적을 섭렵했다. 다양한 책들을 보면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아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는 것.


첫째는 불안감이 높아 위험하거나 생소한 것에 굉장히 예민한 아이, 대개 이런 아이의 경우 안전하다고 만져보라고 말을 해도 본인이 안심이 될 때까지 절대 만져보지 않는다.

둘째는 호기심히 심하게 많아 뭐든 일단 만져보고 보는 아이, 대개 이런 아이는 엄마가 뜨거우니까 만지지 말라고 해도 진짜 안 뜨거운지 지가 만지고 아 엄청 뜨겁네 진짜 뜨겁네!! 해야 직성이 풀린다.


첫번째의 경우 생존 본능이 크고, 이런 아이들이 머리가 좋을 확률이 높단다. 두번째의 경우 마냥 해맑은 것 같다. 우리집에 사는 정봄이라는 아이가 딱 두번째 아이에 해당한다. 봄인 오븐이 뜨겁다는 걸 기어코 만져보고 알았다. 호기심 천국에 마냥 해벌쭉 만지지 말라는 건 일단 만지고 시작한다.



나는 봄이를 데리고 혼자 나가지 않는다. 예전에 걷지 못할 때는 유모차에 태워 그래도 지금보다는 나가긴 했는데, 봄이가 걷기 시작하고 유모차도 자전거도 타지 않으려고 한 뒤로는 웬만해서는 남편을 꼭 대동한다. 내 선에서 봄이를 케어하기 힘들 때가 많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사건이 터진 뒤로는 일단 가지 않게 되었다.


언젠가 남편이 재택을 하고 있을 때였다. 대개 식재료나 필요한 것들은 쿠팡 로켓프레시로 주문하곤 하는데, 전 날 너무 피곤한 나머지 봄이를 재우다 또 같이 잠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당장 우유가 없었다. 봄이는 우유를 먹어야 하고, 남편도 아침을 먹어야 하는데 마땅한 재료가 남아있질 않았다.


아침 일찍 집 앞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의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봄이 옷을 입혔다. 3분거리에 있으니 금방 다녀오면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때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대충 옷을 입히고 나도 잠옷에 롱패딩만 걸쳤다. 문을 닫고 분주하게 일하고 있는 남편의 방문 앞에다 다녀오겠노라며 소리를 지르고는 봄이에게 마스크를 씌웠다. 그리고 호기롭게 집을 나섰다.

 


가는 길부터 모험이었다. 정봄은 미친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너를 혼자서 데리고 나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새 그걸 까먹고 너를 데리고 나왔구나. 나는 마트에 다다르기까지 정봄을 100번정도 불렀다. 손을 잡으면 낑낑대고 내뺐다. 그리고는 아파트 중앙의 찻길로 냅다 달려나갔다. 남편과 항상 봄이는 체육을 시켜야 할 것 같다고 농담삼아 말하기는 했지만, 진짜 쟨 운동을 해야하는 애구나 싶은 생각이 들만큼 겁나 잘 달렸다.


그렇게 잡고 달리고 붙잡고 달리고를 반복해서 3분 거리를 15분만에 도착했다. 이미 내 몸은 땀범벅이었다. 잠옷이라 롱패딩을 벗을 수도 없고, 그야말로 땀에 절어 아침부터 기운이 쭈욱 빠졌다. 그것도 모르는 정봄은 그저 신나서 마트의 자동문이 열리자 마자 카운터에 서 계시는 아주머니에게 "안녕하쩨여!!!!"를 시전하고 또 달리기 시작했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나는 정말 등골이 서늘해진다는 말을 그 때 처음 느꼈다.


바깥처럼 "정봄!!!" "야 정봄!!!!"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입을 앙 다물고 그저 몸으로 냅다 달려 정봄을 낚아 채는 수밖에는 없었다. 마트 안에서도 잡고 놓치고를 몇 분간 하다가 이러다가는 아무것도 못 사겠네, 하는 생각이 들어 일단 봄이를 카운터 앞에 내려놨다. 그리고 우사인 볼트 빙의버전으로 우유를 냅으려는 순간이었다.


"딸기!! 딸기!!!!"

정봄의 눈에 딸기가 들어왔다. 그리고 카운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딸기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 키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 딸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휘저었다. 아! 정말 모든 장면이 슬로우 모션처럼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으안도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다라 하나에 14900원 하는 딸기가 우수수 떨어졌다. 정확히는 다라 다섯개가 아래로 후두두두 떨어졌다. 내 눈을 의심했다. 안돼!!!!를 소리치며 봄이에게 달려갔지만 이미 늦었다. 딸기는 이미 떨어졌다. 정말 등골이 서늘했다. 두피에 있는 모든 모근이 바짝 섰다. 그 와중에 다라 한 개는 터져서 딸기가 우수수수 이곳 저곳으로 흩어져 날아갔다. 아! 아!!! 아!!! 꿈이라고 해주세요!!!!!!!!


봄일 째려봤다. 봄이가 소리를 질렀다. 딸기! 딸기! 딸기!!!!

미안하다 미안해. 딸기 안 사줘서 미안하다고.

나는 롱패딩 아래 수면바지를 삐쭉 내밀고 청승맞게 딸기를 하나씩 줍기 시작했다. 원래 사려던 우유는 집어오지도 못했다. 왜 하필 집으려는 찰나에 이런 일이 벌어지니. 딸기를 하나씩 다 줍고 흐트러진 딸기를 차곡차곡 모아 카운터에 갔다. 사려는 계획은 1도 없던 딸기만 잔뜩 샀다. 74,500원이었다. 그와중에 카운터 아주머니께 주문처럼 외웠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양 손 가득 딸기를 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 지옥같았다. 봄이를 잡을 수 있는 건 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그 날을 생각하면 등골이 오싹하다. 딸기만 보면 그날이 스친다. 이 정봄자식.. 이....2....



봄인 3월 1일에 태어났다. 설 명절에 코로나 때문에 친정에 가지 못했다. 대신 남편에게 방학도 줄겸 2월 말 봄이랑 2주정도 친정에 머물기 위해 짐을 챙겨 왔다. 마침 봄이 두돌 생일이 껴 있었다. 친정부모님은 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고 싶다고 하셨다. 얼씨구나 좋다며 다같이 옷을 입었다. 근처 쇼핑몰에 있는 토이저러스에 가서 레고나 사와야겠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내 발걸음만 가벼운게 아니었다. 정봄의 발걸음은 마치 구름같았다. 자기 선물을 사든 말든 일단 상관없다. 나온 것만으로도 정봄에게는 천국과 같은 시간이었다. 게다가 토이저러스라니. 남편과 마트에 가면 절대 장난감 코너를 지나지 않는데, 어쩌다 이걸 간과했을까.

들어가는 초입, 넘어져도 굴하지 않고 엄마를 벗어나야 한다는 의지를 볼 수 있는 정봄의 모습. 남편에게 이르려고 찍다 나중에는 핸폰도 흘리면서 봄이를 잡으러 다녔읍니다 ㅠㅠ

토이저러스에 도착한 봄이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세상 이런 곳은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봄이를 통제하기 위해 봄이가 입고 있는 패딩의 모자를 붙들고 있었다. 그랬더니 정봄은 겉옷을 벗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질주였다. 빛의 속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1월보다 2개월이나 더 자란 상태였다. 봄이의 운동신경은 날로 자라고 있다는 걸 증명하듯 아 진짜 쏜살처럼 달렸다.


달렸다. 나도 달렸다. 정봄은 이곳저곳 누비며 누리고 있었다. 땀이 흘렀다. 쟤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마! 소리를 들으면 귀가 쫑긋해서는 한 번 만지던 걸 다섯번을 빠르게 만졌다. 이...2....새.. 끌어오르는 욕을 집어 삼키고 정봄을 달리기 위해 나도 겉옷을 벗었다. 엄마와 아빠는 입을 헤벌쭉 벌렸다. 쟤가 저렇게 빠른앤줄 몰랐단다. 나도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인 줄은 몰랐어요 엄뫄아뽜...


잡힌 봄이는 빠져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단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래도 웃긴건 드러 누워 울지는 않는다. 다만 나를 놓으라 시위를 할 뿐, 낑낑대서 간신히 빠져나가면 달려나가고, 내가 또 잡으면 낑낑대며 드러눕고 자기를 놓으라 말한다. 놔둬! 놔둬! 그노무 놔둬소리는 진짜. 언제배웠니 내가 자주 쓰기는 했지만 널 놔두라고 한 말은 아닌데 말이다.



"야 남자앤 줄 알았다. 봄이 체육해야겠어"

엄마와 아빠는 쉼 없이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셨다. 예.. 저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오늘 더 뼈저리게 느꼈지 모에오.. 그래오.. 마자오...


결국 봄이는 엄마아빠가 레고를 결제하는 동안 내 어깨에 들쳐매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 짧은 시간동안 토이저러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우릴 쳐다봤다. 세상 구경난 것처럼 우리의 질주를 구경했다. 그 어디에도 봄이처럼 뛰어다니는 아이는 없었다.


들쳐맨 봄이를 주차장 에스컬레이터에 이르러서야 내려놓았다. 봄이도 더 이상은 장난감 가게 내부로 갈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앞만 보고 멍하니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턱 막힌 숨을 내쉬었다. 한껏 숨을 고르고 아빠의 차에 올라탔다. 내가 하도 막무가내로 봄일 잡아와서 그런지 봄이는 가만히 창밖만 보고 있었다. 끌어오르던 분노는 어디가고 멍하니 창밖만 보던 봄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올랐다. 웃기지도 않다.


"봄아, 엄마가 봄이 못 돌아다니게 해서 봄이 많이 섭섭했어?"

"아니? 괜차나. 봄이 배고파"


띠용

봄인 웃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고기가 먹고 싶단다. 그래, 빨리 집에 가서 고기먹자.



아기를 낳기 전, 더 나아가서는 결혼을 하기 전 공공장소에서 뛰어다니는 애기들을 보며 속으로 많은 욕을 하곤 했다. 쟤 엄마는 뭐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철이 없었다. 걔 엄마도 같이 뛰면서 그 아이를 잡느라 땀을 훔치고 있었을텐데. 나는 앞으로 토이저러스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 날의 기억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아마 나로 인해 불편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과거의 나처럼 봄이와 나를 향해 혀를 끌끌 차는 사람도 분명 있었을 거다. 그런 분들에게는 여기를 빌려서라도 죄송한 말씀을 올린다. 죄송합니다. 봄이가 달리기 질주본능을 여기에서 펼칠 줄은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존경의 말씀을 또 올린다.

여자 아이 하나 키우는데도 이렇게 땀을 찔찔 흘리며 잡으러 다니느라 개고생을 하는데 (둘째는 없다고 결심), 둘이며, 셋이며 게다가 넷 이상 아이를 낳아, 심지어 아들만 키우시는 부모님들의 인내력과 체력과 대단한 마음에 정말 크나 큰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어떻게 이런 과정을 다 이겨내시고 그렇게 예쁘고 바르게 아이들을 키우셨나요. 저는 지금도 봄이를 집에 둘 생각 밖에 들지 않는데요(흑흑)


게으르고 느린 나무늘보 엄마가 제리같이 날쌘 딸램을 키우면서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죄송하고 존경합니다. 분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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