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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고 Apr 04. 2021

우리집 생명존

파테크 중입니다.

수원에서 돌아온 날이었다.


그 당시 연일 파값에 대한 뉴스가 우후죽순으로 나오고 있었다. 나는 수원에 3주가까이 있었는데,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모르고 파를 김치냉장고에 방치해뒀다는 생각만 퍼뜩 올라왔다. 빨리 집에 가서 파부터 썰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에 돌아오자 마자 김치냉장고 문을 열었는데, 없다. 파가 없다.


설마..하고 열어본 냉동실에는.. 뚜둥...덜덜덜...


남편은 항상 모든 음식들을 냉동실에 넣어 놓는다. 차라리 김치냉장고에서 썩게 뒀으면 썩은 부분만 도려낼텐데. 남편은 저걸 굳이 통째로 냉동실에 넣고 손도 못대게 만들어 버렸다. 사실 적잖이 화가 났다. 잘라서 냉동실에 넣을게 아니라면 그냥 만지지를 말지. 더 화가 났던 건, 그 바로 옆에 음식물 쓰레기가 있었다. 오..오...오!!!!!

일찍이 파를 정리해놓지 않은 내가 죄다.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하나씩 빼서 가위로 잘라 쓰려고 했더니, 파가 다 어그러진다. 사실 한 두번 있던 일이 아니라서 더 화가났다. 그냥 두라고. 통째로 넣을거면 그냥 두라고. 그냥 두라고!!! 몇 번을 말했지만 남편은 그 때뿐이었다. 그리고 썰어놓은 파는 자기가 제일 많이 쓴다. 앜앜앜!!!


아무튼 파는 필요하니 마트에 갔다. 한 단에 7200원이었다. 그래도 내가 뉴스에서 봤던 것보다는 가격이 많이 내렸다. 항상 파를 1500원 주고 사던 내 입장에서 파를 굳이 먹어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가슴 시린 가격이었다. 게다가 파가 냉동실에 버젓이 있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 먹고 이렇게 새로운 파를 산다는 게 나름 주부로서 굉장히 슬펐다.


4월부터 파 값이 내린다고 하지만, 다들 파를 키워먹는다니, 이렇게 된거 우리도 키워먹자!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페트병을 자르고 물을 담았다. 파는 송송 썰다가 뿌리가 있는 부분만 남겼다. 깨끗하게 흙을 씻겨내고 물에 담갔다. 그리고 하루, 이틀, 시간을 보냈다.

첫날과 둘째날, 하루밖에 안 지났는데도 위로 뿅 올라왔다.
셋째날과 넷째날, 이후로는 사진도 안 찍어서 사진이 없다.


베란다 창가에 자리 잡은 파는 생각보다 쑥쑥 자랐다. 하루하루 파의 성장세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다음 날부터 초록색을 보이더니, 일주일이 지나자 정말 먹을 수 있을 만큼 길게 자라났다. 꽃망울인지 봉우리인지, 여태 파를 키워본 적 없는 나로서는 이게 뭔지 모르나 아무튼 뭔가 결실을 맺기도 했다. 이제 페트평이 짧은지 휘어지기도 한다. 파들은 정말 내가 준 정성과는 반비례하게 보란듯이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리고 2주차 되는 오늘. 진짜 어쩜 이렇게 잘 자라니 너


그렇게, 잘라먹으려 기른 판데.

봄이가 아침마다 일어나 커텐을 걷으며 파들아 안녕! 자라면 맛있게 냠! 하고 인사를 하던 파들인데,

막상 먹으려니 미안하고 또 죄스러워서 못 먹겠다. 못 먹겠다.


분갈이를 해야하나.

이런 바보 같은 생각만 하는게 정상 맞는거죠 그런거쬬 녜?


토마토도 키워볼까 하고 화분과 흙을 주문했다 취소했다. 그냥 파만 길러야겠다. 부디 가위로 싹둑 자를 수 있기를 이 멍청한 사람아, 그리고 키우세요 파! 생명력이 느껴지는 파가 나도 잊고 있던 에너지를 주네용. (^___^)! 다만 저는 못 먹겠습니다 엉엉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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