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로빈 Jan 28. 2017

혼자 여행해야 할 이유

포르투갈 여행기 (4)

어릴 때부터 엄마가 "넓은 세상을 봐야 마음이 넓어지는 거야"라며 여행 예찬론을 폈기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 혼밥이니 혼술이니 열풍이 불기 전부터 혼자 여행도 곧잘 다니곤 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아니 어떻게 여자 혼자 여행을 그렇게 다니냐"고 한마디씩 했지만 막상 여행지로 떠나 보면 나보다 훨씬 더 오래 먼곳을 혼자 여행하는 여자 여행자들이 많아서 오히려 내가 놀라기도 했다. 이정도로 돌아다닐 줄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시집갈 때 된 다 큰 여자애가 혼자 싸돌아 다니니 엄마는 점점 당황하는 듯했다.


나자레에서 파티마 가는 길에 거쳐야했던 소도시 Leiria. 딱히 볼 곳은 없었다. 흐린 날씨와 적당히 한적한 공원 풍경은 쓸쓸하면서도 홀가분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누구랑 같이 가면 좋겠지만 일일히 시간과 일정을 맞추기도 귀찮고, 그래서 한두 번 혼자 다니다 보니 점점 혼자 다니는게 편해졌다. 나는 혼자 하는 여행이 왜 좋은 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건 내가 호기심은 많은데 소심하고 주변의 영향을 잘 받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좋은 곳을 남도 같이 좋아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나만 만족스럽고 같이 간 사람이 "여긴 별로네"라는 말이라도 한다면 나는 무척 의기소침해 질 것이다. 의견의 차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만큼 편안한 사람과 같이 간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런 사람은 흔치 않을 뿐더러 평소에는 잘 맞는 것 같다가도 여행지에서 말 한마디로 그런 차이가 드러나 버리면 당혹스럽다. 그런 불편한 마음으로 여행지의 감흥을 망쳐버리고 싶지 않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여행의 장점은 좋을때 엄청 좋다는 점이고, 단점은 안 좋을 때 더 없이 안좋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안정적인 수익률을 추구하는 투자자처럼 누군가의 평가에 관계 없이 나만의 평정심을 유지한 채 여행의 즐거움을 (때로는 돌발 상황을) 즐기고 싶다.

소심한데 호기심과 성취감도 충족시켜야 하는 나는 중대한 업무나 어려운 일이 아니라 일상의 작은 성공을 통해 자존감을 높이고 긍정적인 강화를 받아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적어도 나에게 더없이 좋은 활력소다. 시간에 쫓기는 회사일에서 일이 하나 틀어지기라도 하면 피해가 크지만 여행지에서는 큰 사고를 겪지 않는 이상 길을 좀 헤매든, 가려던 박물관이 휴무이든 설사 돌발상황이나 계획에서 어긋나는 일이 벌어져도 그리 큰 일이 아니다. 오히려 뜻하지 않은 추억이 될 수도 있고 즐거운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때로는 점심 메뉴 하나조차 내 뜻대로 선택할 수 없는 삶에서 한발 떨어져 내 마음가는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데도 실패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고 헤메도 누구 하나 뭐라 하지 않는다. 일정 하나 짜는 데도 온갖 경우의 수를 다 들이대는 결정장애 마저도 궁극에는 '뜻 깊은 여행'이라는 목표에 이르는 작은 과정으로 남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성취를 집이 아닌 새로운 공간에서 이룬다는 점에서 그 만족감은 몇 배 더 커진다.


골목을 지나다 고양이를 발견하고 멈춰 서는 시간 따위가 나에게는 중요하다.


나에게 다가와 준다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는 누군가가 옆에서 '언제 끝나나' 하는 기운을 뿜으며 기다리면 살짝 눈치가 보일지도.


사람 없는 골목길에서 만나는 낙서 같은 길 안내가 혼자 걸을때는 무척 반갑다.



또한 혼자 여행할 때 여행의 경험이 오롯이 내것이 된다. 물론 누군가와 함께 좋은 감상을 공유하는 것도 (안하다 해보니 더) 좋더라. 그러나 혼자 있을 때 감상과 생각의 폭이 더 크다. 누군가와 의견을 맞춰가야 하는 은근한 감정 소모에서 벗어나 온전히 여행의 경험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다. '좋다'는 의미가 혼자일 때랑 둘일 때 각각 좀 달랐달까.

낯선 풍경 안에 나라는 사람을 넣어봄으로써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하고 여행지의 삶도 더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나자레에서 파티마를 다녀오던 날, 버스 터미널에서 영화로 배운 미국 액센트를 지닌 포르투갈 청년과 정치 이야기를 나누거나 영어를 못하던 카페 주인에게 손짓 발짓으로 주문했던 일, 괜히 현지인 흉내를 내며 에스프레소 한잔을 바에 서서 마셔보는 것, 무료한 얼굴을 한 다른 사람들과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간 맞춰 플랫폼에 들어온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 허겁지겁 물어보고 버스에 올라탔던 일들은 둘 보다 혼자 있었기에 가능했고 더 재미있었던 여행의 추억이다. 저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저들은 어떤 사이일까. 혼자 있을 때 여행지의 삶과 사람들의 모습에 더 귀 기울일 수 있다. 여행자가 그들에게 관심을 가질 때 그들도 혼자 온 여행객에게 쉽사리 마음을 연다. 새로운 사람들을 더 쉽게 사귈 수 있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이야기다.



혼자 파티마로 향하며 버스를 갈아타는 동안 터미널 주변을 탐색하며 아침을 때웠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 구글 번역기를 쓰며 포르투갈어로 주문하자 종업원이 해맑게 웃었다.



혼자 여행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둘이 함께 여행하는 즐거움과 혼자 하는 여행의 묘미를 모두 알고 있다. 누군가와 함께 여행해야만 하는 사람은 혼자 하는 여행의 즐거운 외로움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외로우면서도 즐거운 시간 속에서 나는 오롯이 나와 대화한다. 물론 그 대화가 현실에서의 문제나 인생의 고민을 단번에 해결해주지는 못하지만. 켜켜이 마음 한쪽에 쌓여 언젠가는 유용한 거름으로 쓰이길 바라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고픈 마음은 남산타워에서나 Leiria 개천 다리에서나 변함없는듯. 혼자 시간을 보낼 때 곁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애틋하고 소중해진다.





작가의 이전글 구경을 강요하지 않는 곳, 리스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