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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성경쓰기

by 안나

이냐시오, 잘 지냈니?


누나는 정말 힘들고 바쁜 날들을 보냈다. 꼴랑 몇 줄 더 잘 써 보자고, 논문 한 줄에 며칠을 끙끙 앓았다.

사실 쓰면 쓸 수록, 공부하면 공부할 수록, 내가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된다. 가끔은 그런 내가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나를 가리느라 애쓰는 내 모습을 보면 애처롭기도 하다. 더 잘 해보고자 하면 할 수록,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더 빨리 지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뭐든지 다 그런 것 같다. 내가 집요하게 추구하고자 하거나, 욕심을 부리는 것, 집착하는 것... 그것들 때문에 우리의 인생이 참 피폐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 보다 더 다른 것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셨던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영원하지 않은 것들에 너무 많은 집착과 의미를 두면, 우리의 삶이 힘들어지기에 하셨던 말씀이 아닐까 싶다. 나도 내가 살아가면서 내려 놓아야 할 것들, 정리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묵주기도로 하루를 시작한다. 같은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하는 묵주기도를 하게 되면, 신기하게 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산란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편안해 진다.


우리집과 상관없는 인터폰, 출처: 네이버


어제는 집에 인터폰이 고장나서 관리사무소 시설팀에 연락해서 인터폰을 고쳤다. 시간이 좀 걸렸기에 시설팀 직원과 이런 저런 아파트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야기가 재밌으셨는지 관리비 줄이는 팁을 몇개 주고 가셨다. 그리고 관리비(전기세, 난방비)가 줄면, 반드시 커피 한잔 사달라고 하셨다. 평소같으면 관리사무소 직원과 한마디도 안하고 그 불편한 정적을 참지 못해 커피를 끓인다거나 주방을 정리하거나 그랬을 텐데, 어제의 나는 관리사무소 직원을 잘 맞이하고, 대화를 잘 나누고 있었단다.


내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겸손함을 추구하면서도, 남을 잘 무시하거나 사람을 하대하는 행동도 서슴치 않게 했던 것 같다. 조금만 누군가 내게 선을 넘으려고 하면 그것을 잘 못 참고, 한마디를 해 준다거나 아니면 나의 바운더리에 침범할 수 없도록 큰 펜스를 쳤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말투와 억양 눈빛에 집중했고, 상대가 나에게 왜 이런말을 했는지 하루종일 생각하며 곱씹었던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내가 사람을 보는 관점이 의심에서 시작된 것 같다. 그러니, 얼마나 힘든 인생이였을까? 그런데, 그런 내가 이제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100프로 변화한 것은 아닌데,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이제는 먼저 내가 사람을 믿어보는 쪽으로 선택 하게 되었다.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자신을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나니 왜이리 마음이 가볍고 편안할까? 자연스럽게 상대를 무시하거나 하대할 필요가 없어졌다. 내가 상대보다 더 나은 사람일 필요가 없어졌다. 다음주에 관리사무소에 커피 좀 사가야 겠다.


은총성경쓰기, 출처: 예스24


최근에 아버지가 연락이 와서, 엄마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하신다.

노년이 되어도 노년을 받아드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사회심리학자 에릭슨은, 우리의 인생에서 노년을 멸망 vs 완성으로 정의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노년을 받아드린 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 같다. 나도 노년을 잘 보내려면 지금 내게 있는 과업들을 잘 해결하고 나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곰곰히 생각하다가 시편 따라쓰기 책을 샀다. 아버지가 노년을 잘 보내시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가장 좋을까 생각하다가, 시편을 따라 쓰게 하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태어나 평생을 살며 위로 받지 못한 마음들을 시편을 통해 구석구석 치유받으면 좋겠다는, 그냥... 딸의 마음이다. 그래야, 아버지도 노년이 되는 외로움과 허망함이 받아드림과 완성으로 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나의 노년도 행복하길 바란다. 어릴 적 우리가 부모를 모방하듯, 우리는 노년의 우리 부모들을 모방한다.

나의 노년이 행복하려면, 우리 부모님의 노년도 행복해야 한다. 예전부터 부모님께 유산으로 요청했던 것이 딱 하나 있다.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쓰셨던 성경쓰기' 인데, 살아가면서 따라 써내려간 부모님의 글씨와 문체속에서, 드문 드문 노트에 묻은 음식물이나 냄새를 통해, 가끔은 감동이 되어 눈물이 떨어진 페이지를 통해, 우리 부모님의 삶을 많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이냐시오! 너를 위해서도, 성경쓰기를 했던 것이 있는데 그것을 다 완성하면서 내 가슴속에 박힌 너와의 헤어짐으로 인해 생긴 깊은 슬픔을 모두 하느님께 바쳤다. 그리고 반드시 너를 꼭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니, 내 마음 속 깊은 슬픔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잘 살면, 내가 하늘나라로 가는 날 너를 꼭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희망'하기러 했다. 인간의 시간의 범주에서는 이 하루하루가 너무 길고 힘이 들지만, 하느님의 시간에는 하루도 천년같고, 천년도 하루와 같을테니 말이다. 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 이제는 오히려 기쁘다. 그러니 너도 하늘나라에서 기뻐하렴!


요즘 작업을 많이 했어서 그런지 어깨, 허리가 너무 아프다.

오늘 물리치료를 받으면서, 몸이 좀 편안해 지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오늘 하루도 잘 지내야겠다. 정리해야 할 논문들도 잘 정리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고, 가능하다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마음도 배워야겠다. 피곤하고 힘든일도 많지만, 다 좋은 일이 되기 위한 기반이라고 잘 받아드리며 살아야겠다. 너도, 누나를 위해서 함께 기도 해 주렴.


그립구나,

누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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