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두 인생을 살아봐> , 사랑의 대전제는 책임이다 -
며칠 전 넷플릭스에서 <두 인생을 살아봐>라는 영화를 봤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한 친구와 어쩌다 하룻밤(!)을 보낸 주인공이 졸업식 날 밤에 컨디션 이상을 겪으면서 임신인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과 그 삶의 면면에 대한 이야기가 시간 순으로 번갈아가며 펼쳐졌다.
영화를 보면서, 이 줄거리를 구상한 작가는 틀림없이 애엄마일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엄마가 아닌 사람은 엄마인 삶을 그다지 상상하지 않지만, 엄마로 사는 사람들은 엄마가 아닌 인생에 대해 때로 열심히 상상하곤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냐고? 바로 나 역시도 지금 이 순간 엄마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내 처지가 처지인지라 그런지, 인생의 모든 것을 차근차근 계획해나가던 주인공이 이제 겨우 대학을 졸업한 마당에 전혀 계획에 없었던 엄마로서의 삶에 자신을 내던지고 그 고난을 헤쳐가는 모습이 눈물겹고 안쓰러워보이기까지 했다. 인상깊었던 점은 주인공의 부모님도 어엿한 성인으로 주인공을 대하고, 집의 방 한칸을 내어줄 지언정 부모로서의 역할에 간섭을 하지도, 크게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는 점이었다. 황혼육아가 대세 아닌 대세가 되고, 조부모님의 도움이 없이는 육아가 어렵다는 요즘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육아는 부모의 역할이고, 부모로서의 자녀가 애틋하고 안쓰러워도 반드시 부모가 겪어야 할 어려움과 힘듦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넘어서는 도움은 도움이 아니라 참견이고 오히려 부모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에 간섭하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뚜렷한 직장이 없고 의식주를 부모의 도움으로 근근히 해결하지만, 부모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려는 두 젊은이의 모습에서 사랑보다는 오히려 책임감이 느껴졌다.
부모가 된 평행세계에서 두 남녀는 책임있는 자세로 공동육아에 참여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내려놓았음에도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함께 공동양육자가 된 남자의 인생에는 관여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이상은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투로 대하면서. 사랑으로 함께 하는 관계에서 아이를 낳았다기 보다는 어쩌다 아이를 낳고 함께하게 되었으니 이 관계의 우선순위는 두 사람보다는 아이 중심이었다. 그러니 사랑이라는 추가적인 위험을 감수하기란 어려운 선택이고,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것을 피하는 편이 옳은 선택이라고 자신도 모르는 마음을 합리화 하면서.
다행히(?) 계획대로 LA에 가게된 다른 평행세계에서의 주인공은 운명처럼 자신을 꼭 닮은 반쪽을 찾고 꿈의 직장에도 취직하지만, 그렇게 순조로울줄만 알았던 인생도 계속 쉽게 흘러가지는 않았다. 언제나 함께 있을것만 같던 남자친구는 자신의 꿈을 좇아 멀리 떠나고, 열심히 공들여 만든 포트폴리오를 겨우 대표에게 보였더니 졸지에 혹평을 당한다.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밀려드는 패배감, 내내 꿈과 인생의 전부였던 그림을 더는 그리지 않게 되었다.
이토록 다른 두 가지 인생,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두 평행세계의 인생은, 결국엔 스스로의 목소리를 찾고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깨닫는 순간에 한 점에서 만난다. 엄마로서 살아가든, 엄마가 아닌 나로서 살아가든 어쩌면 그것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떤 인생을 살아가든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나는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나에게는 내 자신이 전부일 수밖에 없는 까닭에.
엄마로 살아가는데 열중하다보면 엄마로서의 책임이 얼마나 무겁고 힘겨운 것인지 매일이 어렵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보다도 책임감 있는 태도로 매 순간 아이를 대하는 것이 더 어렵다. 마냥 하고 싶은대로 하게 두는게 아니라 규칙과 규율을 가르쳐야하고, 나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밥을 먹거나 심지어 화장실에 가는 일보다도)보다 아이를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다른건 몰라도 시간은 한정되어 있어 늘이고 줄일 수 없으니 나는 나를 깎아서 나에게 써야한다. 아이에게 내가 필요한 시간, 마땅히 아이에게 내어줘야할 나의 시간을 깎아낼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엄마로서 가져야 할, 아이에 대한 당연한 책임이고 당연한 사랑이다.
그래서 엄마의 시간은 늘 두 개로 간다. 내가 돌봐야 하는 아이가 있는 한 내가 나를 돌보는 시간은 그만큼 적어지고, 그마저도 거의 없을 때가 더 많다. 아이는 여전히 밤에도 혼자 잠에 못 들고, 밤중에도 몇 번을 울다가 깨곤 한다. 엄마만 바라보고 온종일 엄마한테만 매달려대는 아이와 내내 씨름하다보면 그 지친 하루의 끝에서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가만히 눈 감고 누워서, 몸도 머리도 조용히 비워내고만 싶어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감기는 눈을 부릅뜨고, 자다 깬 아이를 다시 부리나케 토닥여가며, 나는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길지 않은 이만큼의 글을 쓰는데만도 아이는 벌써 세번째 잠에서 깨어 나를 찾아 울었지만. 내 인생이 두 개의 시간으로 흘러가더라도 나는 그 두 개의 시간을 책임있게 살아가야하고, 동시에 이런 나를 사랑할 책임이 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