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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mhyeonju Apr 06. 2016

그럴 수도 있지

'부모'와 '부모' 사이에 다른 그 무엇 


  친구가 아기를 낳았다. 아이를 보러 오라기에 조리원은 남편이나 직계가족 외에는 출입이 안되는 것 아니냐 했더니, 원마다 방침이 달라 괜찮다고 했다. 무엇을 사들고 갈까 고민하다가, 꽃가루가 날리지 않는 꽃으로 골라 한다발을 샀다. 아기의 탄생은 물론이고 어엿한 엄마가 된 친구를 축하하고 싶었다. 


  두꺼운 유리창 너머엔 눈도 아직 뜨지 못한, 꽃 송이 만큼이나 작은 주먹을 꼭 쥐고 있는 아기들이 엄마의 이름이 적힌 이름표를 달고 누워있었다. 고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는 게 어쩜 그리도 귀여운지. 널 낳느라고 너희 엄마가 고생 꽤나 했다, 요 녀석-하고 생각하던 찰나, 갑자기 뒤통수가 훅 하는 따가움에 놀라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예닐곱 살 정도 되어보이는 아이였다. 정확히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동생을 보러 엄마 아빠를 보러 온 첫째 아이로 보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할머니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다 가까이에 서 있던 내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고 흔든 것이었다. 


  머리카락도 머리카락이지만, 아이의 쥐는 힘이 어찌나 센 지, 아이를 내 뒷통수로부터 떨어뜨리는 데도 힘이 들었다. 그래, 애가 뭘 알고 일부러 그랬겠나 싶어 “얘, 이렇게 잡아당기면 이모 가 아야해. 자, 놔줘야지?" 라고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아이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다. 


  내내 애를 안고 있으면서도 이 상황에 뭐라 말 한마디도 않던 그 아이의 할머니는, 내가 아이의 손을 밀어내자마자 한다는 말이,“아니, 지금 뭐하는 거야. 애를 왜 밀쳐. 애가 그럴 수도 있지.” 였다. 결국 아이에게 머리카락이 뽑혔을지언정, 인내심의 배수구를 막고 있던 이성을 뽑아버린 것이 바로 저 한마디였다.  


“아니, 방금 뭐라고요? 애가 그럴수도 있다고요?”  

  틀린 말은 아니다. 애는 ‘모르고’ 그럴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어른은 달라야하는 것 아닌가. 어른은 아이가 모르는 상황에 어떻게 해야하는 지를 가르치고 알려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 온 나로서는, 아무리 좋게 들으려고 해도 저 말 속에 미안한 마음이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부모님은 언니와 내가 어렸을 때 부터 “너희가 밖에서 잘못을 저지르면, 그것은 부모에게 먹칠하는 행동이야. 항상 행동에 책임감을 가져라.” 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때로 아이들에게는 백 번의 말보다 한 번의 회초리가 더 큰 교훈을 남기기도 하는 법, 우리 자매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까지 잘못한 일에는 파리채로 손바닥을 맞았다. 부모가 모든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행동양식을 매번 정의해 줄 수는 없다. 다만 그 핵심을 알려줄 수는 있다. 고의였든, 고의가 아니었든, 상대에게 해를 끼치거나 피해를 입혔다면 그것에 대해 미안함과 책임의식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 아이가 내 머리카락을 몇 올이나 뽑아버렸는지는, 사실 중요치 않다. 아이는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모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다가 당사자가 아이에게 나지막하게 타이르고 행동을 제지할 때, 역으로 비난하는 것은 무슨 심리인지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암만 고의가 아니었다해도 잘못에 대해 사과하는 법을 배우게 하고, 같은 행동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보호자의 역할이 아닌가? 내가 여태 잘못 알고 있었나? "뭘 이런걸 가지고 그래요?" "애가 그럴 수도 있는거지” 라는 말이 과연 지금 저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인 건가?

나는 그 쯤에서 생각하는 것을 멈추었다. 


  이 아이의 엄마도 분명 이 조리원에 계속 있을텐데, 행여나 목소리를 높였다가 친구에게 피해가 갈까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데도 흘겨보는 그 할머니의 눈빛에 도저히 친구 아이를 계속 보고 있을 기분이 아니라, “애가 그럴 수도 있다는 말은 제 입에서 나와야 될 말 아닌가요? 그게 사과로 들리지는 않는데.”라고 조용히 말했다. 아이의 할머니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 소리를 내뱉었고, 아이의 아빠는 얼굴을 붉히고 말 없이 황급하게 자리를 떴다. 그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더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툭하면 싸우는 연년생 자매를 키운 엄마는,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결코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반면에 다른 사람이 실수하거나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대하는 법을 배우길 바라셨다. “그러면 안된다”와 “그럴 수도 있지”의 주체를 구분하길 바라셨다. 이해심이나 배려는 강제나 강요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부탁하고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는 “양해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하지 않던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라는 것도, 무릎을 꿇고 빌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아이쿠, 미안합니다" 멋쩍게 한마디만 하면 "애가 모르고 그럴 수도 있지요. 괜찮습니다" 하고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일이었다. 서로 기분 상할 것도, 불편하게 인상 쓸 일도 아니었다. 따지자면 겨우 머리카락 몇 가닥 뽑혔을 뿐인데 도저히 찝찝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부엌에 앉아 생밤을 까고 계셨다. 엄마는 자초지종을 다 들으시더니, “네가 할 말 까지 대신 해주고 싶으셨던가 보네. 그러려니 해라.”하셨다. 그 할머니는 행여 내 이해심이 모자랄까봐 본인이 대신 내 몫까지 이해해주겠다는 심보였나. 

  아니,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기기에는 할머니 나이가 너무 많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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