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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끄러운 크림색 노트

by LEESHOOP 리슙



윈스턴의 거실에는 창문 맞은편의 기다란 벽이 설치되어 있다. 이 벽 한쪽 끝에 윈스턴이 지금 앉아 있는 움뚝 들어간 곳이 있는데, 이는 아마도 맨 처음 맨션을 지을 때 책장을 놓기 위해서 그렇게 만든 듯하다. 그런데 이 움푹 들어간 곳에 앉아서 몸을 잘 숨기기만 하면, 텔레스크린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다. 물론 윈스턴이 내는 소리는 들리겠지만, 지금처럼 몸을 움츠리고 있는 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어쨌든 거실이 이처럼 독특한 구조를 지닌 것도 그가 이제 막 시작하려는 일의 부분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주요 동기는 서랍에서 방금 꺼낸 노트에 있었다. 그것은 그야말로 근사한 노트였다. 오래되어 색이 약간 누렇게 바래기는 했지만, 매끄러운 크림색 종이로 된 노트는 적어도 지난 사십 년 동안은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었다.(중략)


윈스턴이 시작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이었다. 윈스턴은 펜촉을 펜대에 꽂고 펜 끝의 기름기를 닦아냈다. 펜은 서명할 때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 구식 필기도구였다. 그럼에도 그가 그것을 남몰래 어렵사리 구한 이유는 근사한 크림색 노트에는 볼펜으로 끼적거리기보다 진짜 펜촉으로 써야 어울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손으로 글을 쓰는 일에 익숙지 않았다. 아주 짧은 글 외에는 모든 것을 구술기록기에 불러주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판촉을 잉크에 적시고 잠시 머뭇거렸다. 짜릿한 전율이 뱃속을 훑고 지나갔다. 종이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결단력이 필요한 중대 행위였다. 그는 작고 서둔 글씨로 다음과 같이 썼다.



1984년 4월 4일




-조지 오웰, 《1984》중에 -






인간을 다시 인간답게 되돌려주는 처방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의식을 기울여 천천히 수저 젓가락질 하기, 천천히 꼭꼭 씹으면서 음식 맛보기, 침대에 누워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만히 의식하기, 커피 또는 차를 마시기 전 눈을 감고 향부터 깊게 들이마시기, 주변 풍경을 의식하면서 걷기 등등. 이것들은 모두 공통적으로 전제 조건 하나만 잘 지키면 되는데, 그것은 다른 화면을 동시에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핸드폰이나 TV, 컴퓨터 등을 말이다. 한 번에 한 가지만 야 한다. 이외에도 글쓰기 시 매우 뛰어난 특효약로 널리 알려져 있다,



라는 글을 기름에 쩐 감자튀김을 먹으며 허겁지겁 쓰고 있다.



비록 모니터 밖의 현실은 인간의 그것과는 다소 거리가 머나, 머지않아 다시 인간으로 돌아갈 날을 꿈꾸니, 조지 오웰의 《1984》속 '크림색 노트'가 떠올랐다. '빅브라더'라는 독재자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세상 속에서, 왜 그가 종이 한 장 글씨 한 자에 전율을 느꼈는지 더욱 알 것만 같은 오늘이다. 그가 세상에 빼앗긴 자신을 다시 되찾으려 했던 것처럼 나는 나에게 빼앗긴 나를 다시 되찾기 위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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