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없는 불신은 폭력이다
"아이가 하는 말을 믿으세요?"
나의 대답은,
"네."
몇 초간의 정적.
핸드폰 액정의 뜨거운 온도.
소리는 안 들리지만 분명히 요동치는 거대한 무언가.
통화가 끝난 후 대화를 되짚어 본다. 아무래도 아이를 미성숙과 불신의 대상으로 덮어씌우는 건 전제 순서가 잘못 됐다는 느낌을 준다. 아이 역시 어른과 다를 바 없이 변화하고 움직이고 거짓말한다. 다만 어른과의 차이가 있다면 아이의 변화 속도와 폭이 훨씬 더 빠르고 크다는 점이다. 자주 불규칙하고 불안정해진다. 어른이 고체라면 아이는 이제 막 지상에 내려앉으려는 비와 수증기 그 중간쯤이다. 아이를 향해 의심부터 던지고 싶을 때 이와 같은 다름을 먼저 의식적으로 되뇐다면 적어도 갈등이 극단까지 치닫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항상 믿음이 첫 번째이고 불신이 두 번째이다.
Understanding a statement must begin with an attempt to believe it: you must first know what the idea would mean if it were true. Only then can you decide whether or not to unbelieve it.
어떤 진술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믿으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즉, 당신은 그 아이디어가 만약 '사실'이라면 무엇을 의미할지를 먼저 알아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을 믿지 않을지 결정할 수 있다.
Daniel Kahneman, 《THINKING, FAST AND SLOW》
보통 신뢰가 가져다 줄 기대치는 곧잘 떠올리지만 불신의 대가는 쉬이 짐작하지 못한다. 오히려 불신을 현명함의 방증으로 여기기도 한다.
물론 믿음이 항상 아름다운 결말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종졸 실망과 상처로 돌아온다. 크기도 농도도 다양하다. 뒤돌자마자 잊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몇 년이 지나도 어제처럼 선명한 것도 있다.
그래도 시간이란 약을 들이켜 회복된 후 돌이켜 보면 역시 신뢰는 밑져야 본전치기, 제로썸 게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계산 없는 사랑, 나를 온전히 벗어나 있던 몰입 경험은 온전히 내 것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고스란히 축적된 흔적들은 새로운 통찰력을 만나는 순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으로 발을 내딛게 해 준다. 잊혔던 고대 왕국이 되살아나 황금빛을 내뿜듯이 스러진 존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여기에 내가 보낸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던, 때론 그보다 훨씬 더 큰 감동을 줬던 결말들까지 합한다면 삶은 한층 더 풍부해지고 깊게 물들어간다. 맹목적인 신뢰가 불러올 수 있는 재앙도 깨어있는 지성과 양심이 있다면 우리를 끝까지 덮치지 않고 비껴갈 것이다.
불신이 불러오는 불행은 의외로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습관처럼 타인을 헐뜯고 평가하는 사람은 사실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해 그런 거기 때문이다. 듣는 사람도 괴로운데 당사자 속은 말도 못 할 것이다.
내 최악의 절망도 언제나 나 자신을 믿지 못할 때 찾아오곤 했다. 바닥난 자기 신뢰감 위로 자기혐오와 불신만 떠다녀 숨통을 조인다. 불신이 하나의 희망도 남김없이 모조리 다 터트렸을 때 가라앉은 인간은 이번 생을 포기하거나 아님 타인의 생을 으스려뜨리려 날뛴다. '불신'은 나와 타인을 '지옥'으로 순식간에 몰아넣는다.
이처럼 자기 자신도 잠식당하기 쉬운 게 불신이므로 타인에게는 신중히 행사해야 한다. 특히 아이와의 관계에선 더욱 그렇다. 우리도 타인이 말없이 보내는 못 미더운 눈초리를 즉각 알아차리는데, 아이는 오죽하겠는가. 우리가 상대방의 불신을 못 견뎌하듯이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분께 묻고 싶었다.
불신이 당신을 성장시켰는지,
신뢰가 당신을 성장시켰는지.
수렁텅이에 빠졌을 때
불신이 당신을 건졌는지,
신뢰가 당신을 건졌는지.
언제나 사람들이 원하는 건 불신이 아니라 신뢰였다. 어리다고 해서 다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길 바란다.
이해 없는 불신은 폭력이다.